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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월풀, 삼성·LG 정조준…"수입가 낮춰 관세 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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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월풀, 삼성·LG 정조준…"수입가 낮춰 관세 회피"

한국산 세탁기 수입가 838달러→73달러 급락…WSJ, 의혹 데이터 공개
경쟁사 "실적 부진에 따른 흠집내기" 반박…단순 통계 오류 가능성도
중국 동부에 위치한 한 가전제품 공장의 세탁기 생산 라인 모습. 사진=게티이미지/AFP/연합뉴스이미지 확대보기
중국 동부에 위치한 한 가전제품 공장의 세탁기 생산 라인 모습. 사진=게티이미지/AFP/연합뉴스
미국 가전업체 월풀(Whirlpool)이 삼성전자, LG전자 등 해외 경쟁사들이 수입품 가격을 의도적으로 낮춰 신고하는 방식으로 막대한 관세를 회피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해 새로운 무역 분쟁의 포문을 열었다. 월풀은 미국 연방 데이터를 근거로 지난 6월부터 특정 수입 가전제품의 관세 신고 단가(customs value)가 비정상적으로 급락했다며 트럼프 행정부에 조사를 촉구하고 나섰다. 세수 확대와 미국 제조업 보호를 목표로 강력한 관세 정책을 펼쳐온 트럼프 행정부가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지 업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월풀이 문제 삼은 핵심 근거는 미국 인구조사국이 집계한 수입 통관 데이터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지난 14일(현지시각) 이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일부 품목의 가격 하락은 극적이다. 중국산 음식물 처리기의 평균 신고 가격은 올해 1~5월 21달러 수준이었으나 6월 9달러, 7월에는 8달러 미만으로 곤두박질쳤다. 태국산 가스레인지는 평균 가격이 절반 이하인 175달러로 떨어졌고, 특히 한국산 세탁기는 838달러에서 73달러라는 상식 밖의 수준으로 폭락했다.

월풀 측은 13%에서 최고 60%에 이르는 고율 관세가 붙는 이들 제품의 실제 소매가는 변동이 거의 없었다며 "단순 원가 절감이 아닌 관세 회피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번 의혹 제기는 관세를 경제 정책의 핵심 기조로 삼아온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과 맞물려 파장을 낳을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행정부는 세수 증대와 미국 내 제조업 보호를 명분으로 고율 관세를 유지하며 무역 사기 단속 강화를 공언했다. 실제로 미국 법무부는 국토안보부와 합동으로 지난 8월 말 관세 회피와 밀수를 전담하는 전담팀(Task Force)을 꾸리는 등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WSJ "한국산 세탁기 838달러→73달러"…월풀, 의혹 데이터 공개


월풀은 미국 관세국경보호청(CBP) 등 관계 당국과 우려를 공유했다고 밝혔으나, 아직 공식 법적 절차를 밟지는 않았다. 록 크릭 트레이드의 대니얼 캘훈 고문은 "현 행정부가 모든 관세 회피 시도를 신속하고 단호하게 처리해 잠재 부정행위자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보낼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상무부 관리로 일했다.

월풀이 해외 경쟁사를 상대로 불공정 무역 문제를 제기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2018년에도 수입 세탁기에 대한 관세 부과 소송을 이끌어내 이긴 적이 있다. 당시 소송의 여파로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미국 현지에 세탁기 공장을 세웠다.

월풀은 자사의 정보망과 데이터를 종합해 삼성전자와 LG전자, 그리고 GE 어플라이언스를 인수한 중국 하이얼을 주요 의심 기업으로 지목했다. 미국 내 판매 제품의 80%를 현지에서 생산하는 월풀은 이들 경쟁사에 데이터 문제를 제기하며 맞서왔다고 전했다.

이에 각 사는 즉각 반박에 나섰다. 삼성전자는 공식 논평을 거부했다. LG전자는 "미국 법규를 철저히 준수한다"는 원칙을 밝혔다. GE 어플라이언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월풀의 주장은 부정확하다"고 일축하며 "월풀의 이번 공격은 자사의 부진한 실적에 대한 좌절감의 표출로 보인다"고 맞받았다. 실제로 월풀의 주가는 올해 들어 부진한 수요 탓에 약 20% 하락했다.

통계 오류 가능성도…관세 당국 자동 검증 시스템이 변수


한편, 업계 전문가들은 다른 가능성도 내놓는다. 카고트랜스의 눈치오 데 필리피스 공동 최고경영자는 "단순 데이터 입력 오류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지난 6월 새로운 철강 관세 제도가 도입되면서 통관 신고 절차가 복잡해졌고, 일부 중개인이 실수로 수량을 이중으로 입력하면서 단가가 급락한 것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이 일어났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미국 관세국경보호청(CBP)의 시스템이 비정상으로 낮은 단가 신고를 자동 검출해 통관 담당자에게 알리고 수정·검증을 거치게 하므로 실제 대규모 사기로 이어졌을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도 나온다.

최근 법무부가 캘리포니아 의류업체 바코 유니폼스를 공급업체와 짜고 수입품을 싸게 신고한 혐의로 기소한 사례는 정부의 강경 의지를 보여준다. 정부는 바코가 가격 인하를 위해 공급업체의 탈세에 동조했다고 주장했으나, 바코 측은 "직접 관세 납부 의무자가 아니며 공모한 사실이 없다"고 맞서고 있다.

앞으로 트럼프 행정부가 무역 사기 단속 강화 기조 속에서 월풀의 문제 제기를 정치 쟁점화할 가능성이 있다. 만약 조사를 통해 고의 저가 신고 사실이 드러난다면 삼성·LG·하이얼 등은 막대한 추가 관세와 벌금 부과에 직면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 자료 오류로 판명될 때, 이번 사안은 월풀이 경쟁 우위를 점하기 위해 벌인 산업, 정치 차원의 로비 활동으로 해석될 여지도 남는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