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금이 칩 구매로 회귀…오라클·AMD·소프트뱅크까지 얽힌 거대 자금망
업계 '성장 위한 선순환' 항변 속 닷컴 버블 기시감…시장 불안 고조
업계 '성장 위한 선순환' 항변 속 닷컴 버블 기시감…시장 불안 고조

인공지능(AI) 혁명이 전 세계 산업 지형을 뒤흔드는 가운데, 그 심장부인 오픈AI와 엔비디아를 중심으로 한 천문학적 규모의 '순환 거래(Circular Deals)'가 수면 위로 떠오르며 'AI 거품론'에 불을 지피고 있다. 한 기업의 투자가 파트너사의 제품 구매로 이어지고, 그 매출이 다시 투자로 연결되는 복잡한 자금의 고리, 이른바 '순환하는 자금 흐름(financing circle)'이 AI 산업의 가치를 인위로 부풀리고 있다는 의구심이 짙어지고 있다고 블룸버그통신이 8일(현지시각) 꼬집었다. 1조 달러를 넘어선 AI 붐의 이면에 드리운 그림자이자, 자칫 세계 경제를 뒤흔들 수 있는 잠재적 위험 신호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꼬리 무는 투자와 구매…거미줄처럼 얽힌 AI 동맹
논란의 중심에는 AI 시대의 개막을 알린 챗GPT 개발사 오픈AI와 AI 칩 시장의 절대 강자 엔비디아가 있다. 불과 2주 전, 엔비디아는 오픈AI의 데이터센터 구축을 위해 최대 1000억 달러(약 140조 원)라는 천문학적 금액을 투자하기로 합의했다. 그러자 오픈AI는 이 데이터센터를 수백만 개의 엔비디아 칩으로 채우겠다고 약속했다. 엔비디아의 투자금이 고스란히 엔비디아의 칩 매출로 되돌아오는 구조에 시장에서는 즉각 '순환 거래'라는 비판이 나왔다. 일부는 과거 닷컴 버블 때 비슷한 투자 관계가 붕괴를 촉발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오픈AI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사한 거래를 이어갔다. 이번 주에는 엔비디아의 경쟁사인 AMD와 수백억 달러 규모의 칩 도입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이 계약의 대가로 오픈AI는 AMD의 주요 주주로 등극할 예정이다. AMD와 오픈AI의 계약 역시 순환 관계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신생 클라우드 기업 코어위브의 사례는 이러한 관계망의 복잡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엔비디아는 코어위브의 기업공개(IPO) 때 지분 7%를 인수하며 든든한 우군이 되어주었다. 이후 엔비디아는 자사의 칩을 빌려주는 사업을 하는 코어위브로부터 63억 달러(약 8조 9300억 원) 규모의 클라우드 서비스를 구매하기로 했다. 여기에 오픈AI까지 가세했다. 오픈AI는 IPO 이전 코어위브로부터 3억 5000만 달러(약 4960억 원)의 지분을 확보했으며, 최근 클라우드 계약 규모를 224억 달러(약 31조 7500억 원)까지 늘렸다. 이로써 엔비디아는 코어위브의 지분을 보유한 투자자이고, 코어위브는 엔비디아 칩을 대량 임대해 오픈AI에 클라우드 서비스를 제공하는 복잡한 상호 의존 관계를 맺었다.
엇갈리는 시선…"선순환" vs "닷컴 버블의 전조"
전례 없는 속도로 천문학적인 자금이 오가는 현상을 두고 업계와 시장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기술 업계 경영진들은 AI 서비스에 대한 폭발적인 수요를 감당하기 위한 불가피하고 효율 높은 방식이라고 항변한다. AMD의 리사 수 최고경영자(CEO)는 블룸버그 TV와의 인터뷰에서 오픈AI와의 파트너십을 "선순환적이고 긍정적인 고리"라고 평가했다. 오픈AI의 그렉 브록만 사장 역시 "챗GPT와 같은 서비스를 뒷받침할 막대한 컴퓨팅 파워 수요를 맞추려면 전체 AI 공급망을 활용하는 산업 전반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국 정부 또한 중국과의 기술 패권 경쟁을 의식한 듯 자유방임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백악관 AI·암호화폐 분야의 데이비드 색스 최고 책임자는 "그들(기업들)에게 달린 문제"라며 "우리는 미국 기업의 성공을 원한다"고 밝혔다.
반면 시장 분석가와 학계에서는 2000년대 초반의 '닷컴 버블'을 떠올리며 깊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당시에도 스타트업들이 서로의 광고를 사주며 매출을 부풀리는 순환 거래가 횡행하다 거품 붕괴로 이어진 탓이다. 이러한 거래는 일종의 '공급자 금융(Vendor Financing)' 형태로 볼 수 있지만, AI 분야에서는 그 규모가 전례 없이 크고 관계가 복잡하다는 점을 문제로 꼽는다.
모닝스타의 브라이언 콜렐로 분석가는 "만약 1년 뒤 AI 버블이 터진다면, 이번 거래는 그 초기 단서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며 "상황이 악화하면 순환 관계가 문제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버드 케네디 스쿨의 파울루 카르바오 선임 연구원은 닷컴 버블과의 유사성을 더욱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는 "1990년대 후반 순환 거래는 주로 스타트업 간 광고나 교차 판매에 집중됐지만, 오늘날 AI 기업들은 실제 제품과 고객을 보유하고 있다는 차이점은 있다"면서도 "그들의 지출이 수익화를 앞지르고 있다는 점은 동일하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오라클의 낮은 수익은 이러한 우려에 기름을 부었다. 최근 공개된 내부 문건에 따르면, 오라클은 엔비디아 칩 기반 서버 임대로 최근 분기 9억 달러(약 1조 2750억 원)의 매출을 올렸지만, 매출 1달러당 총이익은 14센트에 그쳤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오라클의 주가는 급락하며 시장 전반에 불안감을 안겼다.
수조 원의 야망, 불안한 재무구조
문제는 이 거대한 자금 순환의 중심에 있는 오픈AI가 아직 수익을 내지 못하는 스타트업이라는 점이다. 오픈AI의 샘 올트먼 CEO는 막대한 투자에도 수익 창출은 2030년대에 가까워져서야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며, 현재는 성장과 설비 구축에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최첨단 AI 모델에 필요한 인프라 구축에 "수조 달러"를 투자할 것이라는 야심 찬 계획을 밝힌 바 있다.
반면, 엔비디아는 이 '게임'을 지속할 막대한 재정 능력을 갖추고 있다. AI 칩 시장을 독점하며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기업으로 등극한 엔비디아의 시가총액은 4조 5000억 달러(약 6379조 원)에 이른다. 엔비디아는 이 막대한 자금을 AI 생태계 전반에 빠른 속도로 투입하고 있다. 데이터 분석업체 피치북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2024년에만 52건의 AI 기업 투자에 참여했으며, 올해 들어 9월까지 이미 50건의 투자를 단행했다.
이처럼 한쪽은 막대한 현금을 소진하며 미래에 베팅하고, 다른 한쪽은 그 미래를 담보로 막대한 수익을 거두며 생태계를 장악하는 불안한 공생 관계를 맺었다. AI 산업의 미래를 건 이 거대한 실험이 기술 혁신의 밑거름이 될지, 또 한 번의 거품 붕괴로 귀결될지 그 향방에 전 세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번스타인 리서치의 스테이시 라스곤 분석가는 현재 상황을 이렇게 요약했다. "올트먼은 세계 경제를 10년간 추락시킬 수도, 혹은 우리 모두를 약속의 땅으로 이끌 수도 있는 힘을 가졌다. 지금으로서는 어떤 카드가 나올지 알 수 없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