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이례적 유감 표명하며 한발 물러섰지만…차별 관세·투자 압박 여전
정부, '굴복 외교' 넘어 협상 주도권 확보 총력…아시아 동맹국들도 가세
정부, '굴복 외교' 넘어 협상 주도권 확보 총력…아시아 동맹국들도 가세

지난 9월 미국 조지아주 한미 합작 배터리 공장 급습 사건이 한미 통상 관계의 중대 분수령이 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7일(현지시각), 미국의 이례적인 유감 표명으로 외교적 갈등은 일단 봉합됐지만, 이제는 이를 지렛대로 불리한 통상 환경을 개선해야 하는 과제가 부상했다고 보도했다. 막대한 투자 약속과 차별적 관세 장벽 사이에서 한국의 통상 외교가 시험대에 올랐다.
사건은 지난 9월 4일, 조지아주 엘라벨에 새로 짓는 현대자동차와 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공장에서 발생했다. 미 국토안보부 소속 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들이 공장을 급습해 한국 국적자 300여 명을 포함한 약 475명을 체포했다. 단일 사업장을 대상으로 한 역대 최대 규모의 단속으로, 특히 수갑을 찬 노동자들의 모습이 공개되면서 국내 여론은 들끓었다.
미국은 당초 비자 조건 위반을 내세웠으나, 체포된 이들이 대부분 설비·시험을 위한 단기 파견 전문가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무리한 단속이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결국 조현 외교부 장관의 방미 협상과 크리스토퍼 랜다우 미 국무부 부장관의 "깊은 유감" 표명으로 317명의 노동자가 귀국하며 사태는 일단락됐다.
'사과'를 넘어 '실리'를 확보할 기회
재계에서는 사업 정상화에 안도하면서도 이번 사태를 계기로 보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단순히 사건을 덮고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더 큰 불확실성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는 미국의 제조업 부활 정책과 외국인 투자 유치 정책 사이의 모순을 드러낸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실제로 한국 기업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 아래 신음하고 있다. 현대차는 관세 부담을 피하기 위해 2030년까지 미국 내 생산 비중을 판매량의 80%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현재 한국 기업은 25%의 높은 수입 관세를 적용받는 반면, 미국과 무역 협정을 타결한 일본·유럽 경쟁사는 15%의 관세를 내고 있어 불공정한 경쟁에 내몰린 상황이다.
미국의 '유감' 표명은 바로 이 불공정성을 바로잡을 협상의 문을 연 셈이다. 특히 올여름 원칙적으로 합의한 3500억 달러(약 490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 꾸러미는 핵심 협상 카드다. 미국은 투자가 현금으로 이뤄지길 요구하지만, 한국 정부는 우리 경제 충격을 최소화할 대출·대출 보증 방식을 주장해왔다. 이번 사태는 한국 외환보유고의 80% 이상을 투입하라는 무리한 요구 등 독소조항을 재협상 테이블에 올릴 확실한 명분을 제공한다.
"더는 굴복 없다"…미국 압박에 맞서는 아시아
미국의 압박에 맞서 자국의 이익을 지키려는 움직임은 한국만이 아니다. 일본과 대만 등 다른 아시아 핵심 동맹국들 사이에서도 과거와 다른 기류가 흐른다.
일본의 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총재는 5500억 달러(약 770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 합의 이행 과정에서 불공정한 점이 발견되면 "우리 주장을 굽히지 말아야 한다"고 언급하며 미국의 일방주의를 견제했다. 대만 역시 TSMC의 1000억 달러(약 140조 원) 추가 투자 발표 이후 나온 '반도체 생산량 절반 이전' 요구에 라이칭더 총통과 정리쥔 행정원 부원장이 "어떤 압력에도 저항할 것"이라며 강하게 맞섰다.
이는 동맹국들의 순응적 태도가 변곡점을 맞았음을 보여준다. 일방적 요구에 무조건 무릎 꿇는 것이 더는 국익과 기업의 실리에 맞지 않는다는 전략적 판단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조지아 외 다른 주에서 진행 중인 우리 기업들의 인력 운용마저 차질을 빚는 등 '미국 투자 리스크'가 현실화된 만큼, 이제는 보다 정교하고 당당한 통상 외교로 국익을 지켜내야 할 때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