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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일본, '타이완 모델'로 반도체 재건 승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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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일본, '타이완 모델'로 반도체 재건 승부수

TSMC 거점 구마모토, 340헥타르 초대형 과학 단지 시동
민간 디벨로퍼 주도, 産·官·學 집중 연계 시스템 구축 추진
일본 구마모토현에 조성될 대규모 사이언스 파크 조감도. 일본이 타이완의 성공 모델을 본떠 반도체 산업 재건을 위해 민간 주도의 산·관·학 연계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TSMC 구마모토 공장 주변에 340헥타르 규모의 초대형 단지 조성이 시작될 예정이다. 사진=닛케이이미지 확대보기
일본 구마모토현에 조성될 대규모 사이언스 파크 조감도. 일본이 타이완의 성공 모델을 본떠 반도체 산업 재건을 위해 민간 주도의 산·관·학 연계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TSMC 구마모토 공장 주변에 340헥타르 규모의 초대형 단지 조성이 시작될 예정이다. 사진=닛케이

일본 내에서 반도체 산업을 한곳에 모으고 산학 연계를 동시에 하려는 새로운 개발 사업인 '산관학 집적형 반도체 클러스터' '사이언스 파크' 조성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구마모토현은 TSMC 공장 주변을 중심으로 대규모 정비 구상을 내걸었고, 부동산 대기업인 미쓰이 부동산이 전면에 나서 적극적인 참여 의사를 밝혔다. 도호쿠 지방 등 전국 각지에서도 비슷한 계획이 빠르게 늘어나는 흐름이라고 닛케이가 3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이들 개발의 성공 모범은 바로 TSMC의 산실이자 첨단 기술의 요람인 타이완식 반도체 단지 개발 방식이다. 산(産)·관(官)·학(學)이 한 몸이 돼 조기 성장을 이루는 혁신적인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 성공 여부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 방식은 기존의 공장이나 연구소 위주로 흩어져 개발하던 방식과 다르다. 반도체 제조 기업, 연구기관, 대학, 공급망 기업이 한 대규모 부지에 모여 기술, 인재, 생산을 함께 빠르게 혁신하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 클러스터로 반도체 기반 공급망 강화, 인재 육성, 차세대 공정 성장, 나아가 국제 경쟁력을 되찾으려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

TSMC 기쿠요 공장 주변, 초대형 개발 시동


현재 일본 반도체 산업에서 가장 활발한 곳은 단연 구마모토다. 지난 10월 초, TSMC 구마모토 공장이 위치한 기쿠요정(菊陽町)에서는 2027년 말 가동을 목표로 하는 제2공장의 대규모 건설 공사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현장에는 수많은 크레인 차량과 파일 드라이버가 모였고, 토사를 실어 나르는 덤프트럭이 공사 게이트를 쉴 틈 없이 드나들고 있다.
이 지역은 이미 소니 그룹의 반도체 제조 부문과 제조 장비 대기업 도쿄 일렉트론의 거점이 모여 있어, 추가적인 산업 집적을 노리는 야심 찬 계획을 구체화하고 있다. 구마모토현은 지난 3월, '2025년 3월 발표된' '구마모토 사이언스 파크 추진 비전'을 발표하고 TSMC 공장 주변을 핵심 구역으로 설정했다. 반도체 관련 기업과 대학 연구 기관을 유치하고 주택 및 상업 시설 등을 포함해 총 340헥타르(도쿄 돔 약 73개분)에 이르는 초대형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현은 이 단지 개발과 운영을 민간에 맡긴다는 방침 아래 협력 사업자를 공모 중이며, 오는 2025년 말에 최종 결정될 전망이다. 유력 후보인 미쓰이 부동산은 반도체 관련 기업들을 대상으로 단지 조성 관련 의견을 들으며 사업을 구체화하는 데 속도를 내고 있다. 회사 홍보부는 "많은 기업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이 프로젝트는 교통, 주거, 상업 시설도 함께 개발하여 집적된 생태계를 조성하고, 조기 시너지를 노리는 전략을 핵심으로 한다.

미쓰이 부동산은 단지 사무실이나 상업 시설만 짓는 개발사를 넘어, 산·관·학 연계를 촉진해 성장 거점을 창출하는 '산업 디벨로퍼'로의 변신을 선언했다. 실제로 10월 1일 도쿄 니혼바시(日本橋)에 반도체 산업 교류 시설을 열어 관련 정보를 집적하고 이를 단지 운영에 활용할 계획이다.

사이언스 파크가 주목받는 까닭은 기존의 산업·학술 지역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은 과거 공업 단지나 학술 연구 도시처럼 개별 기능만을 모으는 방식을 주로 써왔다. 그러나 사이언스 파크는 기업 공장 외에도 연구 기관, 협력 기업이 주변에 모여 인재 육성과 연구 개발에서 밀접한 협력 관계를 만든다. 이는 조기 산업 발전과 일본 반도체 산업 재건의 핵심 거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타이완 신주과학공원, 압도적 성공의 비결


미쓰이 부동산 등이 본보기로 삼는 선진 모델은 타이완의 '신주 사이언스 파크'다. 1980년 북부에 개설된 이 단지는 과거 찻밭이었던 부지에 TSMC 등 약 600개사가 모여 세계 테크 산업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양명교통대학과 공업기술연구원(ITRI) 같은 타이완의 대표적인 연구 기관들도 입주해 있으며, 미쓰이 부동산은 이미 이들과 연계 협정을 체결했다.

신주 파크의 성공은 '효율적인 운영 체제' 덕분이다. 공영 관리국은 타이완 당국으로부터 상당한 권한을 위임받아 기업들은 입주 심사, 토지 개발 허가, 등기 등의 복잡한 절차를 이곳에서 한 번에 마칠 수 있다. 관리국이 입주, 허가 등 행정권을 대폭 위임받아 기업의 입주와 확장, 기술 사업화, 인재 유치가 빠르게 이뤄지는 점이 핵심 성공 요인으로 분석된다. 유징추(游靜秋) 관리국 부국장은 "행정 서비스를 효율화함으로써 기업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효율적인 운영 시스템 덕분에 신주 파크 입주 기업들의 2024년 합계 매출액은 전년 대비 7% 증가한 1조5146억 타이완 달러(약 70조 원)를 기록했다. 타이완은 신주를 넘어 중부, 남부 등 전국 각지에 단지를 정비하며 인공지능(AI)용 첨단 반도체 개발과 제조를 이끌어가오 있다.

도호쿠·기타큐슈 등 전국 확산, '분산형 파크' 논의도 병행


구마모토 외에도 일본 내 사이언스 파크 개발 움직임은 점차 퍼져나가고 있다. 도호쿠 대학은 2024년 4월 센다이 시내 캠퍼스 부지를 활용하는 '미치노크' 구상을 발표했다. 이 구상은 반도체 R&D·인재육성 거점 조성을 목적으로 한다. 이 구상에도 미쓰이 부동산이 정비에 협력하며, 대학과 연계하는 기업 회원 조직 운영을 담당한다. 도호쿠 대학은 국내 최대급 클린 룸을 보유하는 등 반도체 연구가 활발하다.

기타큐슈(北九州) 시 역시 2025년 2월, 대학과 기업이 모인 '학술 연구 도시'의 기능 강화를 밝혔다. 오는 2035년까지 반도체 관련 등 200건의 기업 유치를 목표로 하며 사이언스 파크로의 도약을 생각한다. 반도체 후공정 분야 세계 최대 기업인 타이완의 ASE 또한 이 지역 진출을 살피고 있다.

한편, 규슈, 오키나와 9개 현은 '신생 실리콘 아일랜드' 실현과 특구제도 만드는 일을 중앙정부에 요구했고, 인프라 조성, 세제 혜택, 규제 완화 확대 움직임 등 정부 지원 논의도 함께 이어지고 있다.

넓은 땅 확보, 국가 관여가 성패 좌우


그러나 일본에서 타이완식 사이언스 파크를 성공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여러 과제가 남아 있다. 가장 어려운 점은 넓은 땅을 확보하는 일이다. 대규모 조성 작업과 복잡한 행정 절차를 거치지 않고서는 필요한 부지를 마련하기 어렵다. 특히 농지, 축산 지역과의 공존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규슈 지역은 이런 현실적인 어려움을 생각해 중소 규모 단지를 복수로 조성하는 '분산형 파크' 정비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또한, 단지 정비에 10년 이상 소요되는 시간을 고려할 때, 주기적인 반도체 시황의 오르내림에 사업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인내심을 가지고 오랜 기간 개발 투자를 이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국가 차원의 적극적인 개입 여부 역시 살펴봐야 할 부분이다. 현재 각지의 구상들은 타이완 당국 수준의 전폭적인 정부 지원을 끌어내지 못했다. 현재 대다수 구상이 '지역 주도'로 주류를 이루고 있어, 국가가 모든 권한을 갖고 직접 지원하는 타이완 사례와는 차이가 있다. 미즈노 유스케 일본 사이언스 파크 협회(가와사키시) 연구원은 "지역 주도 파크 구상이 대다수이며, 국가 산업 정책으로까지 높아지지 못하는 점이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쌓인 어려운 문제들을 이겨내고 일본의 실정에 맞는 개발 모범을 정립할 수 있을지가 이번 프로젝트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일본형 사이언스파크가 대만 신주 모델처럼 산관학 집적, 신속한 행정, 생태계 연쇄작용을 앞세워 반도체, AI 산업의 성장 엔진이 될 가능성은 크다. 다만 대규모 부지와 인프라 확보, 정부 주도력 강화, 장기적 투자 지속성이 성공의 핵심이 될 전망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