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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中 자본 vs 歐 경영진 '반도체 내전'…넥스페리아, 웨이퍼 끊고 전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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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中 자본 vs 歐 경영진 '반도체 내전'…넥스페리아, 웨이퍼 끊고 전면전

中 윙텍 "IT 차단·물량 빼돌리기 당해"…네덜란드 본사 "경영 간섭 말라" 맞불
단순 집안싸움 넘어선 '공급망 인질극'…글로벌 車·가전 업계 '셧다운' 공포 확산
사진=오픈AI의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이미지 확대보기
사진=오픈AI의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
세계 굴지의 레거시(Legacy·성숙 공정) 반도체 기업 넥스페리아(Nexperia)에서 벌어진 경영권 분쟁이 '공급망 인질극'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2019년 넥스페리아를 인수한 중국 모회사 윙텍 테크놀로지(Wingtech Technology)와 네덜란드 본사 경영진 간의 갈등이 웨이퍼 공급 중단과 IT 시스템 차단이라는 물리적 충돌로 비화했다. 이는 중국 자본의 소유권과 서방의 기술·운영권이 충돌하는 '반도체 지정학의 모순'이 폭발한 상징적 사건으로, 자칫 글로벌 자동차 및 산업용 반도체 시장의 연쇄적인 셧다운을 불러올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28일(현지 시각) 외신 톰스 하드웨어 및 업계에 따르면, 넥스페리아 내부의 '내전(Civil War)'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윙텍은 지난 27일 성명을 내고 "네덜란드 본사가 의도적으로 웨이퍼 선적을 중단하고 중국 현지 직원들의 내부 IT 시스템 접속을 끊어버렸다"며 "이는 명백한 기만이자 업무 방해"라고 맹비난했다. 앞서 네덜란드 본사가 "중국 법인이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며 공개 서한을 보낸 데 대해, 윙텍이 "거짓말을 하는 건 그쪽"이라며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주권 회복" vs "탈(脫)중국 생존"…충돌하는 두 개의 세계


이번 사태의 본질은 단순한 감정 싸움이 아니다. 미·중 반도체 패권 전쟁 속에서 생존하려는 서방 경영진과, 자산 통제권을 행사하려는 중국 자본 간의 구조적 충돌이다.

윙텍 측은 "우리는 합법적인 주주로서 권리와 통제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네덜란드 경영진이 윙텍을 의사결정에서 영구히 배제하기 위해 이른바 '비(非)중국(non-Chinese) 공급망'을 은밀히 구축하려 한다고 의심한다. 중국 기업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서방 시장에서 제재를 받을 것을 우려한 네덜란드 경영진이 모회사를 '패싱'하고 독자 노선을 걸으려 한다는 것이다.

반면 네덜란드 본사는 이를 '경영 간섭'으로 받아들인다. 본사 측은 "운영의 안정성을 위해 중국 법인과 수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묵살당했다"며, 현재의 조치가 회사를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임을 시사했다.

말레이시아 3억 달러 투자의 '진실 게임'


양측의 갈등에 기름을 부은 건 넥스페리아의 '말레이시아 투자' 건이다. 네덜란드 본사는 말레이시아 사업장에 3억 달러(약 4200억 원)를 투입해 생산 능력을 키우겠다고 발표했다. 겉으로는 평범한 글로벌 확장 전략처럼 보인다.

하지만 중국 윙텍과 둥관(Dongguan) 법인의 시각은 날카롭다. 그들은 이 투자를 '생산 기지 망명(Exodus)'으로 규정한다. 중국 내 핵심 조립·테스트 거점인 둥관 공장의 물량을 말레이시아로 빼돌려,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장기적으로는 중국 법인을 고립시키려는 '큰 그림'이라는 것이다. 이는 미·중 갈등이 심화하는 가운데,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겪고 있는 '차이나 리스크' 헤지(Hedge) 전략이 내부에서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산업의 쌀'’ 끊기나…전방 산업 초비상


문제는 이 싸움의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튄다는 점이다. 넥스페리아는 최첨단 AI 칩이 아닌, 다이오드·트랜지스터·ESD 보호 소자 등 기초 반도체를 만든다. 하지만 이 부품들은 자동차 ECU, 스마트폰, 산업용 로봇 등 전기가 흐르는 모든 기기에 필수적인 '산업의 쌀'이다. 대체가 쉽지 않고, 하나만 부족해도 완제품 생산 라인이 멈춘다.

넥스페리아 중국 법인은 "10월 이후 500개 고객사에 74억 개의 부품을 출하했다"며 안심시키려 했지만, 시장의 불안은 여전하다. 웨이퍼 공급의 키(Key)를 쥔 네덜란드 본사가 밸브를 잠근 상태가 지속된다면, 재고가 소진되는 시점에 거대한 '공급 절벽'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中 상무부장 긴급 등판…국가 대항전 비화


사태의 심각성은 중국 정부의 개입으로 확인됐다. 왕 원타오(Wang Wentao) 중국 상무부장은 이번 주 독일 경제부 및 EU 통상 담당 고위급 인사들과 연쇄 화상 회의를 갖고 이 문제를 논의했다. 개별 기업의 경영권 분쟁이 외교·통상 이슈로 격상된 이례적인 상황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자국 기업이 인수한 알짜 반도체 회사가 통제권 밖으로 이탈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 읽힌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글로벌 공급망이 정치 논리에 의해 얼마나 쉽게 파편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고장"이라고 분석한다. 레거시 반도체의 강자인 넥스페리아의 '사령탑 공백'이 길어질수록, 그 피해는 고스란히 글로벌 완성차 업체와 IT 제조사들에게 전가될 전망이다. '내전'을 멈추기 위한 양측의 대화가 시급하지만, 이미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기엔 골이 너무 깊다는 비관론이 우세하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