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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 하락이 더 위험"...美 경제학자들, 디플레이션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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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 하락이 더 위험"...美 경제학자들, 디플레이션 경고

식료품 25%·주택 30% 급등에도 "가격 인하는 경기침체 신호"
트럼프 관세 철회 나섰지만...전문가들 "2% 물가 목표가 현실적"
미국 소비자들이 고물가에 신음하고 있지만, 경제학자들은 오히려 물가 하락을 더 우려하고 있다. 물건이 더 이상 시장에 출시되지 않는다는 표식.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미국 소비자들이 고물가에 신음하고 있지만, 경제학자들은 오히려 물가 하락을 더 우려하고 있다. 물건이 더 이상 시장에 출시되지 않는다는 표식. 사진=로이터
미국 소비자들이 고물가에 신음하고 있지만, 경제학자들은 오히려 물가 하락을 더 우려하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가 지난달 30(현지시각) 보도했다.

이 매체는 "물가가 떨어지면 경기침체를 유발하거나 이를 신호할 수 있다"며 디플레이션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5년간 식료품 25%·주택 30% 폭등


보도에 따르면 지난 5년간 미국 식료품 가격은 25% 올랐다. 신차 평균 가격은 5만 달러(7300만 원)를 넘어섰고, 주택 가격은 임대와 매매 모두 30% 상승했다. 에너지 비용과 의료보험료, 육아비용도 급등했다.

물가 인하가 2024년 대선의 핵심 이슈였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첫날부터 소비자 물가를 낮추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워싱턴포스트-ABC뉴스-입소스 여론조사에서 미국인 59%가 현재 인플레이션에 트럼프가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답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고물가 압박에 지난달 14일 커피와 소고기, 바나나 등 200개 이상 식품에 대한 관세를 철회했다.

"가격 하락은 경기침체의 신호이자 원인"


프란체스코 비앙키 존스홉킨스대 경제학과 학과장은 "만약 모든 재화 가격이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떨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몇 년간의 인플레이션으로 근로자 임금도 상승했다""임금은 높은데 재화 가격이 떨어지면 기업들은 직원들에게 급여를 지급할 만큼 충분한 이익을 내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비앙키 학과장은 "이는 고용 비용을 극도로 높이고 경기침체를 유발할 수 있다""그런 경기침체는 물가 하락에 대한 기대를 더욱 강화한다"고 말했다.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의 로라 벨드캠프 교수는 "내일 가격이 더 낮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왜 오늘 구매하겠느냐""물가가 떨어질 것이라고 믿는 순간 수요는 급락하고 즉시 경기침체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그는 "가격 하락은 일반적으로 매우 심각한 부정적 결과와 연관돼 있다"고 강조했다.

연준 목표는 2% 인플레이션


지난 9월 기준 미국의 연간 인플레이션율은 3%로 연방준비제도(연준)의 목표치인 2%보다 높다. 무디스 애널리틱스의 매트 콜리어 이코노미스트는 "인플레이션이 끔찍하긴 하지만, 소매업체들이 가격을 낮추는 것은 실업률이 높은 기간처럼 수요가 크게 감소할 때뿐"이라며 "그런 상황은 정말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비앙키 학과장은 "트럼프 행정부나 연준에서 현실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제로에 가깝게 낮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3%에서 2%로 낮추는 것이 목표이고, 일부 관세를 철회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기업들은 관세가 완전히 철회되더라도 관세 관련 가격 인상분을 모두 없애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의 정책 변화가 잦기 때문에 관세가 다시 부과될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비앙키 학과장은 "식료품점이 자체적으로 가격을 낮추는 모습은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콜리어 이코노미스트는 관세 철회가 "관세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정"이라면서도 "만병통치약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 정책으로 가격을 낮출 수 있는 주요 분야로 주택과 의료를 꼽았다. 정부가 구역 설정과 토지 이용 관련 정책을 통해 주택 건설을 촉진하면 공급 증가로 치솟는 비용을 낮출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한국도 디플레이션 위험 경계해야


미국 경제학자들의 디플레이션 경고는 한국 경제에도 유의미한 메시지를 던진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 102.4%로 미국의 3%보다 낮다. 근원물가(식료품·에너지 제외)2% 안팎에서 관리되고 있다.

수치만 보면 한국이 미국보다 물가 관리를 잘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방심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한국은 미국보다 수출 의존도가 높아 세계 경기 변동에 더 민감하고, 내수 시장이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은 미국과 달리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젊은 소비층이 줄어들면 자연스럽게 소비가 위축되고, 이는 물가 하락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미국이 임금 상승과 물가 하락의 불균형을 우려한다면, 한국은 인구 구조 변화에 따른 구조적 수요 감소를 경계해야 하는 상황이다.

일본의 '잃어버린 20' 교훈


디플레이션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가장 생생한 사례는 일본이다. 1990년대 초 일본은 부동산과 주식 가격이 폭락하는 자산 버블 붕괴를 겪었다. 이후 물가가 계속 떨어지는 디플레이션에 빠졌고, 20년 넘게 경제 성장이 멈춰섰다.

당시 일본 정부는 문제의 심각성을 제때 인식하지 못했다. 은행들의 부실채권을 신속히 처리하지 않았고, 기업들은 투자와 고용을 줄였다. 소비자들은 "내일은 더 싸질 것"이라며 지갑을 닫았고, 경제는 악순환에 빠졌다.

일본의 사례가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일단 디플레이션에 빠지면 빠져나오기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일본은 저출산과 고령화까지 겹치면서 만성적 디플레이션의 구조적 원인이 됐다.

한국 역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저출산·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내수 소비를 떠받치고 적정 물가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물가가 과도하게 오르는 것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떨어지는 것 역시 경기침체의 신호이자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균형 잡힌 경제 정책이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