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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패권의 종언, 세력권 세계의 부활...헤그세스 독트린과 강대국 영향권 인정이 의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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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패권의 종언, 세력권 세계의 부활...헤그세스 독트린과 강대국 영향권 인정이 의미하는 것

서반구 중심 전략과 동맹 자조 요구, 중국 군비 증강의 '존중'까지
미국이 스스로 기획한 자유주의 패권 질서를 접고 현실주의 세력권 구조로 이동할 때의 파장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부 장관이 10월30일(현지시각) 미국 버지니아주 퀀티코 해병대 기지에서 군 고위 지휘관들을 상대로 연설하고 있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부 장관이 10월30일(현지시각) 미국 버지니아주 퀀티코 해병대 기지에서 군 고위 지휘관들을 상대로 연설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냉전 이후 미국 외교의 자기부정


최근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부 장관이 레이건 국방포럼에서 던진 문장은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라 미국 스스로가 지난 30여 년의 대전략을 부정하는 선언이었다.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의 종언이라는 표현은,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이 민주주의 확산과 인권, 시장경제의 보편화라는 언어로 포장해온 자유주의 패권(liberal hegemony)이라는 대전략이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을 전면에 드러낸 것이다.

본지는 미 정치 중심 언론 매체인 폴리티코(Politico)가 지난 12월6일 헤그세스가 새로운 군사 전략과 함께 미국의 유토피아적 이상주의 종언을 선언했다는 제목의 분석 보도를 바탕으로 미국의 이 같은 대전략 변화가 국제 질서에서 갖는 함의와 함께 한국은 안보와 경제를 중심으로 어떤 대응 전략을 추진해야 할지 등을 심층 분석했다. 헤그세스의 유토피아적 이상주의 종언이라는 담론은 지난 11월 말부터 미국이 대전략을 자유주의 패권에서 현실주의 세력균형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문제 제기를 해 온 본지의 의제가 트럼프 2기 행정부 내부에서도 깊숙이 논의되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헤그세스는 민주주의 구축, 개입주의, 정권교체, 기후변화 대응, 각종 각성 담론과 국가 재건을 한 묶음으로 치부하며, 이런 의제들이 미국의 실질적 이익을 잠식해 왔다고 단정한다. 이처럼 가치의 언어를 비용으로 규정하면서도, 그가 제시하는 대안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래된 현실주의의 귀환이다. 다만 이번에는 미국이 스스로 설계한 규범과 제도를 경유하지 않고, 노골적인 영향권 정치와 국익 우선주의로 돌아가겠다는 점에서 그 파괴력의 성격이 다르다.
냉전 종식 이후 워싱턴이 구축해온 국제 질서의 정당성은 자유롭고 개방된 국제 경제와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명분에 기대어 있었다. 헤그세스의 언어는 이 정당성의 기반을 스스로 허물면서, 미국의 행동 기준을 다시 냉혹한 힘과 비용 대비 효익 계산으로 되돌려 놓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자유주의적 외피를 벗겨낸 미국의 맨얼굴을 드러내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서반구로 되돌아가는 군사력, 영향권을 나누는 강대국들


헤그세스가 제시한 새로운 군사 전략의 첫 번째 축은 서반구 중심이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줄곧 반복되어 온 미국 우선주의가 이제는 군사력 배치의 지리적 재배치로 구체화되고 있다. 카리브해에서 진행 중인 마약 선박 격침 작전과 멕시코 국경에 대한 군사적 관여 확대는 그 상징적 출발점이다.

미군이 마약을 실었다고 주장되는 소형 선박을 스무 척 이상 격침시키고 수십 명을 사살한 작전은, 행정부의 표현대로라면 나르코 테러리스트와의 전쟁이지만, 일부 의원과 전문가들은 이를 국제법적 기준에서 전쟁범죄에 가까운 행위로 본다. 그럼에도 국방부 장관과 합참의장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마약을 싣고 이 나라에 들어오려 하면 그 배를 침몰시키겠다는 발언은, 국내 치안과 국경 통제 영역에 군사적 수단을 일상적으로 투입하겠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다.

이 같은 서반구 중심 전략과 병렬적으로 제시된 것이 영향권의 재인정이다. 중국은 태평양에서, 미국은 서반구와 유럽 전반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러시아는 사실상 주변부로 처리하는 그림이다. 헤그세스가 러시아를 거의 언급하지 않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미국 내부에서 러시아를 더 이상 문명적 대결의 상대라기보다는 제한된 역량을 가진 지역 강대국으로 보는 시각이 굳어지고 있음을 반영한다.

실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미국이 더 이상 지구 전역을 균질한 자유주의 영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갖지 않겠다고 선언한 대목이다. 그 대신 강대국들이 각자 자신의 상징적 영향권을 인정받고, 그 안에서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는 현실주의적 세력권 질서를 용인하겠다는 방향이 드러난다. 이는 미·중 경쟁의 성격을 이념 대결에서 영향권 조정과 거래의 공간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중국 군비 증강의 ‘존중’과 관리된 경쟁의 그림


헤그세스가 중국에 대해 사용한 언어는 단순한 명분 조정이 아니다. 중국이 진행해온 역사적 군사력 증강을 존중한다는 표현은, 미국이 더 이상 중국의 군비 증강 그 자체를 국제 질서의 일탈이 아니라 하나의 현실로 인정하겠다는 뜻이다. 그는 동시에 중국 군사력의 속도와 규모, 범위에 대해 냉철하게 보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 표현 속에는 억제가 아니라 관리와 공존을 위한 새 기준이 숨어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중국과의 관계를 안정된 평화, 공정한 무역, 상호 존중의 틀 속에서 재설정하려 한다는 언급은, 이전 정부들이 사용했던 책임 있는 이해당사자나 규범 준수 압박의 언어와는 다르다. 이 프레임 아래에서 미국이 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 제도나 인권이 아니라, 중국이 자국 영향권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힘을 사용하지 말라는 일종의 행동 규칙이다.

문제는 이 같은 접근이 동아시아 동맹 구조와 대만 문제, 남중국해 분쟁과 같은 구체적 쟁점에서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중국의 군사력 증강을 현실로 인정하고, 그 영향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미국이 움직일 경우, 동맹국들이 체감하는 억지력의 신뢰도는 필연적으로 흔들린다. 미국이 전면전의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중국에 맞서는 대신 관리된 경쟁과 거래를 선택할 때, 동맹국의 안보는 더 깊은 자기 책임을 요구받게 된다.

동맹은 ‘아이’가 아니라고 말할 때의 이면


헤그세스는 한국과 폴란드, 독일을 콕 집어 방위비 증액을 칭찬했다. 그는 동맹은 아이가 아니며, 자기 몫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언어는 트럼프 시대 내내 반복되어 온 동맹관의 연장선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예산 협상의 압박 수단을 넘어, 미국의 대전략을 떠받치는 기준으로 격상되고 있다.

동맹은 더 이상 미국이 설계한 규범과 가치의 동반자가 아니라, 미국의 군사적 부담을 분담하는 비용 분할의 파트너로 정의된다. 즉, 미국은 서반구와 국경 방어, 자국 산업 기반 강화에 집중하고, 유럽과 동아시아, 중동의 틈새는 가급적 동맹이 자체 역량으로 메우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동맹의 정치적 선택과 가치 지형에 대한 미국의 시선이다. 국가안보전략은 유럽이 극우 민족주의 정당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유럽의 문명적 자긍심과 서구 정체성 회복을 지원하겠다고 밝힌다. 한편으로는 내정 간섭을 거부하겠다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의 정치 스펙트럼 중 특정한 방향을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동맹은 아이가 아니라는 말은 책임의 전가와 선택의 압박이 동시에 담겨 있다. 부담은 더 지되, 미국이 선호하는 가치와 정체성에 따라 정치 지형을 조정하라는 요구가 깔려 있다. 동맹국 입장에서는 군사비와 정치적 자율성의 균형이라는 이중 과제를 떠안게 되는 구조다.

국경 안보의 군사화와 방산 산업의 슈퍼 차징


서반구 중심 전략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국경 방어의 군사화다. 국경순찰과 해안경비, 마약 단속은 원래 경찰과 세관, 치안 기관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헤그세스는 육상과 해상, 공중을 아우르는 국경 방어 전담 군사 부대를 조직하겠다고 했다. 이 구상은 국가 안보와 치안, 이민 통제를 하나의 군사적 문제로 통합하는 사고를 반영한다.

이와 동시에 그는 방산 산업의 슈퍼 차징을 공언한다. 천문학적 규모의 국방 예산과 함께, 함정과 드론, 골든 돔으로 불리는 새로운 방공 시스템 등으로 상징되는 군사 기술 투자가 이어진다. 서반구 군사력 집중, 국경 방어의 군사화, 방산 산업 슈퍼 차징은 서로 분리된 축이 아니라 하나의 삼각형을 이룬다.

국경과 주변 해역에서의 군사 작전이 일상화될수록, 이를 뒷받침하는 방산 산업의 수요는 더욱 안정적으로 보장된다. 반대로 방산 산업의 이해와 압력이 커질수록, 국경과 서반구에서 군사적 수단을 동원하려는 유인은 더 강해진다. 이 구조 속에서 국내 정치와 인권, 국제법은 점점 뒷전으로 밀려날 위험을 안고 있다.

카리브해 마약 선박 격침 작전과 2차 타격 논란은 이 삼각형의 위험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전쟁범죄 논란에도 불구하고,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은 작전을 옹호하며 되돌릴 수 없는 선을 넘어섰다는 인상을 준다. 국경 방어와 마약 단속이 군사 작전으로 전환될 때, 미국 안보 정책의 윤리적 기준은 어디까지 후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한국과 동맹국에 주어진 새로운 시험


이제 질문은 한국과 동맹국들의 차례다. 헤그세스 독트린은 한국이 익숙하게 전제해온 한·미동맹의 구조를 조용하지만 깊게 흔든다. 미국이 중국 군비 증강을 현실로 인정하고, 영향권을 나누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상황에서, 한국의 안보는 미국의 확장억제 공약과 별개로 자체 억지력과 지역 연대의 수준을 다시 계산해야 하는 국면으로 들어간다.

동시에 미국은 한국을 모범 동맹 사례로 언급하며 방위비 증액과 국방력 강화의 성과를 치켜세운다. 이는 칭찬이면서 동시에 더 큰 요구의 예고다. 미군 전략이 서반구와 국경 방어에 더 깊이 묶일수록,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요구되는 억지력의 상당 부분은 한국 자체의 역량과 한·미·일 협력 구조에 의해 메워져야 한다.

그러나 영향권 정치와 관리된 경쟁의 언어가 본격화되는 순간, 동맹의 의미는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구받게 된다. 미국이 중국과의 전면적 대결 대신 거래와 타협의 공간을 넓혀갈 때, 한반도 문제와 대만, 남중국해는 어떤 우선순위를 배정받을 것인가. 한국이 미국과의 동맹을 통해 얻어온 안보의 우산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실질적 보증을 유지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냉정한 답을 준비하지 않으면, 미국 전략의 축 이동은 한국 안보의 구조적 공백으로 직결될 수 있다.

자유주의 패권의 종언 이후, 현실주의 세력균형으로의 귀환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헤그세스의 연설은 하나의 전환점이다. 미국이 더 이상 자유주의적 명분으로 스스로를 포장하려 들지 않을 때, 세계는 미국의 힘을 보다 직접적이고 거칠게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군사력과 국경, 산업기지, 영향권이라는 단어로 요약되는 현실주의적 자기 이해다.

문제는 이 전환이 세계 질서를 더 안정적으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더 위험하게 만들 것인가이다. 가치와 규범의 언어가 사라진 자리를 순수한 힘의 논리가 메우기 시작하면, 약소국과 중견국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영향권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구조 속에서, 어느 편에도 완전히 기댈 수 없는 국가는 더 높은 수준의 전략적 자율성과 억지력을 확보해야 생존을 담보할 수 있다.

미국의 유토피아적 이상주의가 종언을 맞이한 자리에서,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에게 주어진 과제는 분명하다. 미국의 힘을 냉정하게 계산하되, 그 힘의 축이 이동하는 방향과 속도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 동시에 미국이 인정한 영향권 질서 속에서 자국의 생존 공간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준비되지 않은 현실주의의 귀환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에 대한 전략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헤그세스 독트린은 미국 내부의 자기 성찰이기도 하지만, 동맹과 파트너들에게는 새로운 시험지다. 이제 각 국가는 미국이 더 이상 대신 써주지 않는 답안을 스스로 써야 한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