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심층분석] "동맹은 끝났다"…트럼프 안보전략, 유럽에 '3대 리스크' 초래

글로벌이코노믹

[심층분석] "동맹은 끝났다"…트럼프 안보전략, 유럽에 '3대 리스크' 초래

우크라·에너지·기술 전선서 서방 80년 가치동맹 균열
美, 우크라 지원 '망상' 취급…'영토 내주고 종전' 압박 현실화
"기후 광신도" 비난하며 LNG 공급 지렛대로…EU '그린딜' 좌초 위기
AI 규제는 "미국 기업 탄압"…무역 보복 카드로 유럽 '디지털 주권' 무력화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새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를 통해 유럽연합(EU)을 '문명적 소멸(civilizational erasure)' 위기에 처한 집단이자, 미국의 국익을 갉아먹는 경쟁 세력으로 규정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0년간 서방 세계를 지탱해 온 '가치 동맹'의 공식적인 해체를 의미한다. 이미지=제미나이3이미지 확대보기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새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를 통해 유럽연합(EU)을 '문명적 소멸(civilizational erasure)' 위기에 처한 집단이자, 미국의 국익을 갉아먹는 경쟁 세력으로 규정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0년간 서방 세계를 지탱해 온 '가치 동맹'의 공식적인 해체를 의미한다. 이미지=제미나이3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새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를 통해 유럽연합(EU)'문명적 소멸(civilizational erasure)' 위기에 처한 집단이자, 미국의 국익을 갉아먹는 경쟁 세력으로 규정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0년간 서방 세계를 지탱해 온 '가치 동맹'의 공식적인 해체를 의미한다.

워싱턴 외교가와 통상 전문가들은 이번 전략이 우크라이나 전쟁, 에너지 패권, 인공지능(AI) 기술 표준이라는 '3대 전선'에서 유럽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고 분석한다. 워싱턴과 브뤼셀의 관계는 이제 '상호 협력'이 아닌 철저한 '거래''충돌'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우크라이나, '안보 우산' 걷어치우고 '강제 휴전' 압박


가장 즉각적이고 치명적인 파열음은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터져 나왔다. 미 안보전략 보고서는 유럽이 주도해 온 '우크라이나의 완전한 승리'"비현실적 기대(unrealistic expectations)"라고 일축했다. 이는 미국이 더는 우크라이나의 영토 수복을 돕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지도국으로서 러시아를 억제하던 역할을 내려놓고, 모스크바와 브뤼셀 사이의 '심판' 혹은 '중재자'를 자처하며 발을 빼는 모양새다. 트럼프 대통령은 공약했던 '즉각 종전'을 실현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정부에 러시아가 점령한 영토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협상 테이블에 앉으라고 강요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유럽은 딜레마에 빠졌다. 미국의 군사 정보 자산과 무기 지원 없이 유럽 독자적으로 러시아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다. 안토니우 코스타 유럽정상회의 상임의장이 지난 8일 파리에서 열린 콘퍼런스에서 "적대국뿐 아니라 우리에게 도전하는 동맹국으로부터도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고 역설한 배경에는, 미국의 급격한 태세 전환이 유럽의 안보를 무장해제 시키고 있다는 공포감이 작용한 것이다. 유럽은 어쩔 수 없이 미국의 강제 휴전안을 따르거나, 감당하기 힘든 국방비를 쏟아부으며 각자도생해야 하는 막다른 길에 몰렸다.

에너지, '기후 십자군' 유럽 vs '드릴 베이비' 미국


에너지와 기후 정책은 가치관 충돌이 가장 극명한 분야다. 유럽은 탄소 중립을 목표로 한 '그린딜(Green Deal)'을 미래 성장 동력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의 안보전략은 이를 "경제적 자살 행위이자 기후 광신주의"라고 폄하했다.

미국은 화석연료 생산을 극대화하는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문제는 미국이 세계 최대의 액화천연가스(LNG) 수출국이라는 점이다. 러시아산 가스관을 잠근 유럽은 현재 미국산 LNG에 생존을 걸고 있다.

에너지 전문가들은 트럼프 행정부가 LNG 공급을 지렛대로 유럽의 환경 규제 무력화를 시도할 것으로 본다. 유럽이 미국산 자동차나 농산물에 대한 관세를 낮추거나 환경 기준을 완화하지 않으면, 가스 공급 가격을 올리거나 물량을 줄여 유럽을 압박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유럽 제조업의 원가 경쟁력을 무너뜨리고, EU가 주도해 온 기후 대응 리더십을 뿌리째 흔드는 결과로 이어진다.

AI 및 기술 통상, '규제' vs '자유'의 정면충돌


디지털 정책에서는 '규제 전쟁'이 예고됐다. 유럽은 세계 최초의 포괄적 AI 규제법인 'AI(AI Act)'을 통해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독주를 막고 유럽의 '디지털 주권'을 지키려 한다. 반면, 실리콘밸리를 등에 업은 트럼프 행정부는 이를 "미국 기업에 대한 부당한 탄압"이자 "표현의 자유 억압"으로 규정했다.

미 안보전략이 유럽의 규제를 "정치적 자유 훼손"이라고 명시한 것은, 엑스(X)나 구글 등 자국 기업에 EU가 과징금을 부과할 경우 더는 참지 않겠다는 경고다. 지난 5EU 집행위원회가 엑스(X)에 부과한 12000만 유로(1850억 원) 과징금 사태는 서막에 불과하다. 미국은 1974년 무역법 301조를 발동해 유럽산 제품에 보복 관세를 매기거나, 데이터 전송을 차단해 유럽의 디지털 산업을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맞대응할 공산이 크다.

경제안보, "우리 편 아니면 적"… 자동차·기계, 화학 산업의 위기


경제안보 분야에서 유럽이 겪게 될 위기는 쉽게 말해 "미국이 정한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물건을 팔지도 사지도 못하게 하겠다"는 협박과 같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자동차(벤츠, BMW ), 기계 장비, 화학제품을 수출해 먹고사는 나라들이 많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안에서, 미국 노동자를 써서 만든 물건만 혜택을 주겠다"'미국 우선주의'를 더욱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예를 들어, 유럽 자동차 회사가 미국에 차를 팔려면 미국에 공장을 지어야만 보조금을 받을 수 있게 법을 고치거나, 반대로 중국에 기계를 파는 유럽 기업에 "중국이랑 거래하면 미국 시장에서 퇴출시키겠다"고 압박하는 식이다. 유럽 기업들 입장에서는 거대한 미국 시장을 잃을 수도, 그렇다고 중요 고객인 중국을 당장 끊어낼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다.

유럽으로서는 주력인 자동차와 제조업마저 미국의 견제로 흔들릴 경우 경제 전체가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G2'에서 'G3'로 추락한 유럽, 경쟁력 지표가 말하는 냉혹한 현실


미국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질서 확산의 오랜 파트너인 유럽을 비판하는 데는 이유가 있어 보인다. 유럽의 위기는 수사(修辭)가 아니라 숫자로 증명된다. EU27의 세계 국내총생산(GDP) 비중은 1992년 정점(29%)을 찍은 뒤 가파르게 추락해 202417.5%까지 떨어졌다. 2010년만 해도 26%를 유지하며 미국과 함께 'G2'를 형성했지만, 중국의 부상으로 이제는 미·중에 이은 'G3'로 밀려났다. 회계컨설팅 기업 PwC는 현 추세가 계속되면 2050EU의 글로벌 GDP 비중이 10% 아래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연구개발(R&D) 투자 격차는 더욱 심각하다. 2024EUR&D 집약도는 GDP2.24%, 목표치인 3%에 한참 못 미친다. 같은 기간 미국(3.45%), 한국(4.96%), 일본(3.44%)은 물론 중국(2.68%)에도 추월당했다. 특히 2020년을 기점으로 중국이 EU를 앞서기 시작한 뒤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글로벌 AI 벤처캐피털 투자에서 유럽의 몫은 단 6%에 불과한 반면, 미국은 61%를 독식한다. 반도체 시장점유율도 8~12%에 머물러, 첨단 제조업 주도권은 사실상 상실한 상태다.

노동력 문제도 발목을 잡는다. EU의 중위연령은 44.7세로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 중이며, 2024년 노동생산성 증가율(0.4%)은 미국(1.5%)4분의 1 수준이다.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 총재는 지난해 보고서에서 "행동하지 않으면 유럽은 '느린 죽음'을 맞게 된다"고 경고했다.

뒤늦은 재무장, 그러나 '실행 속도'가 발목


위기감을 느낀 유럽은 뒤늦게 자력갱생에 나섰다. 2024EU 회원국의 국방비는 423억 유로(72조 원)로 전년 대비 11.7% 급증했고, 올해 6월 나토 정상회담에서는 2035년까지 GDP 대비 국방비 5% 목표에 합의했다. EU는 역대 최대인 8000억 유로(1370조 원) 규모의 군사투자 계획 '리암 유럽(ReArm Europe)'을 가동하고, 희토류 공급망 재편을 위해 35억 달러(5조 원) 규모의 '리소스EU' 프로젝트도 출범시켰다.

그러나 실행은 더디다. EU 경쟁력의 미래를 담은 드라기 보고서가 제시한 383개 권고안 가운데 1년이 지난 현재 완전히 이행된 것은 11.2%에 불과하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가 "서방이 80년간 경험한 질서가 끝났다"고 선언했지만, 독일 자체도 2년 연속 역성장(-0.3%, -0.2%)을 기록 중이고, 프랑스는 재정적자가 GDP6%를 넘어섰다. 회원국들은 농업·사회복지 등 '()가 되는' 예산을 국방으로 돌리기를 꺼린다.

유럽의 딜레마는 명확하다. 연간 750~800억 유로(128~137조 원)의 추가 투자가 필요하지만, 재정 여력은 바닥이고 정치적 합의는 지지부진하다. 전문가들은 "유럽에는 아이디어와 수단이 있지만, 이를 실행할 정치력과 리더십이 부재하다"고 진단한다. 미국의 압박과 중국의 추격 사이에서 유럽이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남의 일 아니다'… 한국에 닥칠 트럼프의 청구서


미국과 유럽의 80년 동맹이 금이 가는 소리는 한반도에도 위태로운 경고음을 보낸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새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에서 한국을 모범국가로 지목했지만, 2차 대전 이후 혈맹인 나토 동맹을 '안보 무임승차론'으로 몰아세우고 가치동맹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모습은, 한국이 언제든 직면할 수 있는 미래이기 때문이다.

이에 각계 전문가들은 한국이 지금도 전략적 대응을 가속화하고 있지만, 글로벌 질서 재편에 더 민감하고 철저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방위비 분담금(SMA)의 대폭 증액 압박에 제대로 대응해야 한다. 유럽에 "스스로 지키라"고 요구한 논리는 주한미군 주둔 비용 문제로 직결된다. 트럼프는 지난해 10월 대선 유세 당시 시카고 경제클럽 인터뷰에서 한국을 '머니 머신(money machine)'이라 칭하며 연간 100억 달러, 현재의 약 10배에 달하는 분담금을 요구한 바 있다. 나토와의 갈등은 한국 협상의 예고편이다.

둘째, 역대 최대 대미 무역흑자가 부메랑이 된 '제조업 사면초가'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한국이 2024년 기록한 연간 550억 달러(81조 원) 이상의 대미 무역흑자를 '불공정 거래'의 증거로 지목하고 있다. 이는 유럽을 압박하는 논리와 동일하며, 한국의 5대 주력 산업에 정교한 청구서를 내밀고 있다.

반도체와 배터리는 '보조금 삭감''중국 봉쇄'라는 이중 압박에 직면했다. 트럼프 측은 칩스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보조금을 "해외 기업 퍼주기"로 규정하고 축소하거나, 지급 요건으로 과도한 초과이익 공유와 대중국 공급망의 즉각적인 단절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막대한 대미 투자를 단행한 한국 기업들은 보조금 혜택은 줄고 생산 비용만 급증하는 '투자 덫'에 걸리게 된다.

자동차도 현대차·기아가 미국 현지생산을 늘리고 있지만, 여전히 수출 비중이 높은 제네시스 등 고수익 모델의 15% 관세 장벽이 영업이익률에 부담을 줄 수 있다. 제네시스 브랜드는 현대차그룹 내에서 이익률이 가장 높은 차종으로 알려져 있지만, 미국 시장 판매 물량 중 70% 이상이 국내에서 생산되어 수출되고 있어 관세에 매우 취약하다.

조선과 원전 분야는 기회도 있지만, '강요된 협력'이 리스크가 존재한다. 미국은 쇠락한 자국 해군력 재건을 위해 한국 조선업계에 미국 조선소 인수와 고비용의 현지생산 투자를 압박하고 있으며, 원전은 웨스팅하우스와의 지식재산권 분쟁을 지렛대로 한국의 독자 수출을 막고 미국 주도의 공급망 하청 기지로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

미국은 유럽에 "안보 비용을 내라"고 요구하듯, 한국에는 "무역흑자를 줄이고 미국 내 고비용 투자를 늘리라"는 경제적 압박을 가하는 셈이다. 이는 단순한 무역 갈등을 넘어 한국 제조업의 생존 방정식을 뿌리째 흔드는 실체적 위협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기회로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미국의 제조업 르네상스 정책을 우리 원천 기술 심화로, 미국내 시장 확대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자본과 기술을 미국에 상납하는 구조가 아니라 윈윈(Win-Win)하는 관계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셋째, 외교적 고립 우려도 돌파해야 한다. 그동안 한국은 '··유럽'이라는 서방 연대 속에서 외교적 공간을 확보해 왔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이 쪼개지면 한국은 양자택일을 강요받게 된다.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에 올라타면서도 유럽과의 협력을 유지해야 하는 고난도 외교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설마" 하던 유럽이 맞닥뜨린 '현실'을 한국은 반면교사로 삼아 치밀한 시나리오별 대응책을 더 면밀하게 마련해야 할 시점임을 말해준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