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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관의 글로벌 워치] 패권은 남고 질서는 사라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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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관의 글로벌 워치] 패권은 남고 질서는 사라지고 있는가

트럼프 2기 새 국가안보전략이 드러낸 미중 패권 경쟁의 변질과 한국 대전략의 선택
워싱턴DC에 소재한 미 국방부 청사를 공중에서 내려다본 모습이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워싱턴DC에 소재한 미 국방부 청사를 공중에서 내려다본 모습이다. 사진=로이터

패권 경쟁의 본질이 바뀌고 있

점차 본격화하고 있는 미중 패권 경쟁은 더 이상 단순한 힘의 이전이나 세력 전이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국제정치의 핵심 변화는 패권국이 더 이상 질서를 운영하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미국은 오랫동안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관리자 역할을 수행해 왔다. 동맹을 유지하고 규칙을 만들며 분쟁을 관리하는 비용을 감수하는 것이 패권의 대가라는 점을 스스로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최근 새로 발표한 국가안보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 약칭 NSS)은 미국이 이 같은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 때문에 트럼프의 새 국가안보전략이 보여주는 방향은 패권의 공공성을 포기하고 질서 운영을 사유화하며 동맹을 거래 대상으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심지어 해외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을 새로운 동인도회사로 바꾸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 제기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기존의 미중 패권 경쟁 구도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이제 패권 경쟁의 핵심은 미국이 중국을 억제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이 더 이상 질서를 유지할 의지가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동하고 있다.

패권국의 전략적 후퇴와 질서 관리의 포기


트럼프 2기 새 국가안보전략은 중국을 명시적인 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이는 친중 노선의 선언이 아니라 경쟁 자체를 관리하지 않겠다는 전략적 포기의 성격을 띤다. 냉전기 미국은 소련과 경쟁하면서도 동맹 체계와 규범, 제도라는 질서의 뼈대를 유지했고 패권 경쟁은 질서 내부에서 관리되었다.

그러나 트럼프식 안보 전략에서는 동맹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비용 회수의 대상이 되고 질서는 유지해야 할 자산이 아니라 현금화할 수 있는 자원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이로 인해 미중 경쟁은 누가 더 강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더 빠르게 질서의 공백을 메우느냐의 문제로 전환되고 있다.

중국이 얻는 공간과 떠안게 되는 부담


이 같은 변화 속에서 중국은 단기적으로 전략적 이득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이 세계 질서와 동아시아 역내 질서 운영에서 후퇴할수록 중국은 견제하는 상대가 없는 듯이 전진하는 듯한 공간을 확보한다. 그러나 이는 안정적 패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중국은 아직 동맹 네트워크를 유지할 능력도 충분하지 않고 분쟁을 중재할 신뢰 자산도 부족하며 국제 규칙을 설계하고 집행할 정당성 역시 확보하지 못했다.

이 점에서 트럼프의 국가안보전략은 중국을 성숙한 패권국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관리되지 않은 책임을 떠안은 강대국으로 밀어 올리는 역설적인 효과를 낳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겉보기와 달리 이는 중국에게 선물이라기보다 구조적인 함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질서 붕괴의 최대 피해자는 중견국이다


패권국이 도전국의 등장으로 흔들림에 따라 질서가 약화될수록 가장 큰 위험에 노출되는 국가는 패권국도 도전자도 아니다. 오히려 패권국과의 동맹 질서 속에서 성장해 온 중견국들이다.

이 구조에서 한국은 미중 경쟁의 주변부가 아니라 그 정중앙에 위치한다. 한국은 군사적으로 북핵이라는 실존적 위협을 안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는 미중 기술 경쟁과 공급망 재편의 교차점에 서 있고 외교적으로는 동맹과 전략적 자율성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질서가 작동하던 시기에는 한국이 동맹 안에서 번영할 수 있었지만 질서가 흔들릴수록 한국은 스스로의 전략적 무게로 평가받게 된다.

거래화된 동맹과 한미동맹의 구조적 변화


트럼프의 국가안보전략은 한미동맹을 공식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 발표된 새 국가안보전략은 동맹의 성격을 이전과 달리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동맹은 공동 운명체가 아니라 조건부 계약 관계로 재정의되고 안보는 제공되는 공공재가 아니라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서비스로 전환된 것이다.

이는 일시적인 트럼프 개인의 성향 문제가 아니라 미국 사회 내부에 누적된 패권 비용에 대한 피로감이 구조화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호다. 여기서 한국이 얻어야 할 교훈은 분명하다. 한미동맹은 여전히 필수적이지만 미국과의 동맹 관계만으로는 안보 확보에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는 현실이다.

생존은 더 이상 위임될 수 없다


요컨대 한국이 더 이상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가져서도 안 되는 착각은 미국이 결국 모든 안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인 것이다. 확장억제는 선언일 뿐이며 신뢰는 능력 위에서만 작동한다.

한국은 미국의 정치적 의지 변화와 무관하게 북한 핵무기 위협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의 핵무기 위협까지 억제할 수 있는 독자적 억제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이는 동맹을 약화시키는 선택이 아니라 오히려 동맹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전략적 보완이다.

핵을 말하지 못하는 국가는 전략을 가질 수 없다


미중 경쟁이 심화될수록 핵은 다시 국제정치의 중심으로 복귀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한국만이 핵 문제를 공론의 영역에서 회피하는 국가는 전략적 공백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셈이 된다. 독자 핵무장 여부를 넘어서 한국은 최소한 조건부 핵 옵션과 한미일 핵 협의 구조, 역내 공동 억제 프레임을 공식 전략 언어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무력함의 표현일 뿐이다.

한국은 더 이상 서독 모델을 답습할 수 없다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은 한국이 과거의 서독 모델을 단순히 모방할 수 없다는 점이다. 냉전기 유럽은 비교적 안정된 질서 속에서 관리되었지만 오늘날 동아시아는 훨씬 더 불안정하며 핵 보유국이 밀집해 있고 패권국의 의지마저 흔들리고 있다. 한국은 다른 국가의 모델을 답습하는 국가가 아니라 자신의 지정학적 조건과 기술력, 산업 구조에 맞는 고유한 대전략을 설계해야 한다.

안보와 산업은 분리될 수 없다


트럼프 2기 국가안보전략의 본질은 안보를 경제로 전환하고 경제를 무기로 사용하는 데 있다. 한국 역시 반도체와 인공지능, 배터리, 원전, 방산을 단순한 산업 영역이 아니라 국가 생존 자산으로 인식해야 한다. 기술 주권이 없는 안보는 허구에 불과하며 안보 전략이 없는 산업은 결국 소모될 수밖에 없다.

한국 대전략의 세 가지 축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국의 대전략은 세 가지 축에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첫째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하되 독자적 억제 역량을 제도화해야 한다. 둘째 일본과 인도, 호주, 싱가포르 등 현실적 억제 의지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기능 중심의 실질적 다자 협력을 구축해야 한다. 셋째 중국과는 대결이나 추종이 아닌 관리된 거리두기 전략을 통해 리스크를 통제해야 한다.

질서 붕괴 시대에 전략이 국가를 구한다


트럼프 2기의 국가안보전략은 미국의 일탈을 보여주는 단기적 문서가 아니다. 그것은 탈냉전 시대의 질서가 붕괴하기 시작했다고 알리는 신호다. 이와 함께 동 전략이 만방에 알리고 있는 것은 이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국가가 가치를 선언하는 국가가 아니라 힘과 질서를 함께 설계할 수 있는 국가라는 사실이다.

한국에게 필요한 것은 선악의 판단이 아니라 냉정한 구조 인식과 결단이다. 지금 한국이 전략을 갖지 못한다면 다음 질서는 한국을 고려하지 않은 채 형성될 것이며 질서가 사라진 세계에서 전략 없는 국가는 결국 역사의 객체로 전락하게 된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