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 기반 질서에서 힘의 논리로의 이동과 미중 패권 경쟁, 그리고 한국의 전략적 대응 방안
이미지 확대보기미국의 베네수엘라에서의 군사행동은 단일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충격이었고, 동시에 연쇄 반응의 시작이었다. 그 여진은 남미를 넘어 북극으로, 다시 유럽의 심장부로 퍼져 나가고 있다. 미국 대통령이 그린란드의 전략적 중요성을 다시 언급하자 덴마크와 유럽 내부에서 즉각적인 긴장이 발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특정 국가나 특정 영토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질서를 관리해 온 방식 자체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였던 것이다.
오랫동안 국제질서는 규칙과 제도, 합의와 관리라는 언어로 설명돼 왔다. 패권국은 스스로를 질서의 설계자이자 관리자라고 규정했고, 동맹과 규범을 통해 세계를 운영해 왔다. 그러나 지금 세계는 점점 규칙의 질서에서 영향권의 질서로 이동하고 있다. 이 변화는 선언이나 조약을 통해 나타나지 않는다. 사건과 충격,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이 축적되면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베네수엘라는 그 시작점 가운데 하나였고, 그린란드는 그 여진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상징적인 사례였다.
이제 중요한 질문은 누가 규칙을 말하는가가 아니다. 누가 공간을 요구하는가다. 그리고 그 요구를 관철할 수 있는 힘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다.
영향권 정치의 귀환과 패권의 언어 변화
냉전 이후 국제질서는 주권의 불가침과 규칙 기반 질서를 이상으로 삼아왔다. 현실은 언제나 그 이상을 완전히 따라가지 못했지만, 최소한 규칙이라는 언어는 유지됐다. 패권국은 규칙을 만들었고, 그 규칙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예외는 존재했지만, 언제나 규칙의 틀 안에서 설명됐다.
그러나 최근의 변화는 다르다. 예외가 점점 노골적인 원칙으로 전환되고 있다. 트럼프 2기 미 행정부가 베네수엘라에서 마두로 대통령을 체포해 미 본토로 압송한 사례의 핵심은 정권의 성격이나 인권 문제, 정치적 정당성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패권국이 자국의 핵심 이익이 걸린 지역에서 군사적 강압을 선택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일회성 대응이 아니라 하나의 작동 논리를 보여준다.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타격하고, 그 충격을 통해 주변 질서를 재정렬한다는 논리다.
그린란드에 대한 미국의 반복적인 언급은 이 논리가 북극이라는 새로운 전략 공간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북극은 더 이상 지리적 변방이 아니다. 항로와 자원, 군사 거점이 교차하는 전략의 중심지다. 이 공간에서 미국의 발언이 덴마크뿐 아니라 유럽 전체를 긴장시킨 이유는 분명하다. 동맹이라 해도 영향권 논리 앞에서 자동적인 예외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 때문이다. 패권국은 다시 공간을 요구하고 있다. 규칙을 통해 관리하던 시대에서, 힘을 통해 집행하는 시대로의 이동인 것이다.
유럽의 흔들림과 동맹 질서의 균열
그린란드를 둘러싼 논란은 유럽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동맹은 언제나 안전한가. 집단방위 체제는 모든 상황에서 주권을 보장하는가. 미국의 전략적 요구가 커질수록 유럽은 보호받는 동시에 노출되는 위치에 놓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럽 내부에서 전략적 자율성이라는 개념이 다시 부상하고 있다. 이는 미국과의 결별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의 선택이 언제든 유럽의 부담으로 전가될 수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베네수엘라의 여진과 그린란드의 경고는 유럽에게 질서의 소비자에 머물 수 없다는 현실을 분명히 각인시켰다. 동맹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동맹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보호와 압박은 동시에 작동한다. 이 사실을 직시하는 순간, 동맹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재정의된다.
미중 패권 경쟁의 진화와 전장의 확장
이러한 변화는 미중 패권 경쟁의 성격 변화와 맞물려 있다. 과거의 경쟁은 규범과 제도, 공급망을 둘러싼 장기적인 관리 경쟁에 가까웠다. 충돌은 가능한 한 회피됐고, 상대의 성장을 제약하는 방식이 우선했다. 그러나 최근의 경쟁은 공간과 행동 반경을 둘러싼 강압적 경쟁으로 이동하고 있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이 걸린 지역에서 행동의 자유를 최대화하려 하고, 중국은 이에 대응해 자국의 영향권을 고착화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회색지대는 빠르게 줄어들고, 완충지대는 불안정해진다. 베네수엘라와 그린란드는 이 경쟁의 양 끝단을 보여주는 사례다.
중요한 점은 이 경쟁이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남미와 북극, 동유럽과 동아시아는 서로 분리된 무대가 아니다. 패권국들은 이 공간들을 연결된 전략 공간으로 인식한다. 한 지역에서의 행동은 다른 지역에서의 신호로 작동하고, 그 신호는 다시 새로운 행동을 유발한다. 이러한 연쇄 반응 속에서 세계는 규칙을 통해 경쟁하는 질서에서, 힘의 신호를 주고받는 위험한 무대로 이동하고 있다.
동아시아와 한국이 맞닥뜨린 전략의 시험대
동아시아는 이미 이러한 영향권 경쟁의 최전선에 있다. 대만과 남중국해, 한반도는 미중 경쟁이 가장 응축된 공간이다. 베네수엘라와 그린란드에서 나타난 패턴은 위기 상황에서 동아시아에서도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한반도는 두 가지 위험을 동시에 안고 있다. 하나는 미중 경쟁의 전초기지로 활용될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 위기가 결합될 가능성이다. 대만 해협의 긴장과 북한의 도발이 동시에 발생할 경우, 한국은 선택을 강요받는 위치에 놓일 수 있다. 이때 중립은 실질적인 선택지가 되기 어렵다. 영향권 정치가 작동하는 환경에서 중립은 존중받기보다 전략적 공백으로 인식되기 쉽다.
그렇다고 단순한 편승 역시 해답이 아니다. 무조건적인 추종은 단기적인 안정을 제공할 수 있지만, 장기적인 자율성을 갉아먹는다. 한국의 과제는 동맹을 기반으로 하되, 스스로의 선택지를 갖춘 국가로 진화하는 데 있다. 동맹은 신뢰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확장억지는 선언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메커니즘이어야 한다. 위기 시 의사결정 과정과 정보 공유, 자산 운용의 절차가 명확할수록 외부의 압박은 실질적인 행동 변화를 요구하기 어려워진다.
동시에 한국은 자강을 동맹의 대체물이 아니라 보완물로 인식해야 한다. 독자적 억지 역량을 축적함으로써, 동맹이 흔들릴 경우에도 선택지가 존재함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는 상대의 계산을 바꾸는 힘이다. 재래식 억지와 방어, 지휘통제의 생존성, 새로운 영역까지 포괄하는 통합 억지는 단순한 군사 문제가 아니라 국가 전략의 핵심 요소다.
경제 역시 예외가 아니다. 영향권 정치의 시대에 경제는 더 이상 중립적 영역이 아니다. 교역과 투자는 협력의 수단인 동시에 압박의 도구가 된다. 경제 협력을 유지하되, 특정 국가에 대한 구조적 취약성을 분해하는 전략적 관리가 필요하다. 이는 단절이 아니라 관리이며, 다변화와 대체선 확보, 핵심 기술의 통제는 안보 전략의 일부로 인식돼야 한다.
그린란드를 둘러싼 유럽의 불안은 한국의 미래일 수 있다. 동맹에 안주한 채 전략적 자율성을 축적하지 못하면, 위기 상황에서 선택지는 빠르게 줄어든다. 유럽이 전략적 자율성을 고민하는 이유는 미국을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과 거래할 수 있는 힘을 갖기 위해서다. 한국 역시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앞으로의 위기는 단일 사건이 아니라 결합된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미중 충돌과 북한의 도발, 글로벌 공급망의 충격이 동시에 발생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외교와 군사, 경제가 분리된 대응은 작동하지 않는다. 통합된 국가 전략만이 결합 위기에 대응할 수 있다.
베네수엘라에서 시작된 여진이 그린란드와 유럽을 흔들고 있다면, 그 다음 파장은 동아시아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공포를 조장하기 위한 경고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라는 신호다.
요컨대 영향권 정치의 시대에 한국이 생존하고, 더 나아가 전략적 주체로 남기 위해서는 분명한 원칙이 필요한 것이다. 먼저 동맹을 유지하되 자동화하지 말아야 한다. 자동화된 동맹, 즉 미국이라는 동맹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안보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된다고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준비하되 고립을 택하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경제를 키우되 취약성을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 그때 한국은 더 이상 파장의 수신자가 아니라, 질서 형성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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