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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해군, 구축함 없어 독일에 빌리는 '국가적 망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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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해군, 구축함 없어 독일에 빌리는 '국가적 망신'

대이란전 전개로 전력 공백…NATO 상설해상그룹 지휘권 행사 차질
보유 6척 중 단 2척만 가동…"해상 제권 상실" 보수당 거센 비난
영국 해군의 자존심인 45형(Type 45) 구축함 HMS 드래곤호. 최근 키프로스 기지 드론 공격 대응을 위해 동지중해로 긴급 전개되면서 북대서양 NATO 임무에 공백이 생겼고, 영국은 결국 독일 해군의 작센급 프레깃함을 기함으로 빌려 쓰는 고육책을 택했다. 사진=영국 해군이미지 확대보기
영국 해군의 자존심인 45형(Type 45) 구축함 HMS 드래곤호. 최근 키프로스 기지 드론 공격 대응을 위해 동지중해로 긴급 전개되면서 북대서양 NATO 임무에 공백이 생겼고, 영국은 결국 독일 해군의 작센급 프레깃함을 기함으로 빌려 쓰는 고육책을 택했다. 사진=영국 해군

영국 왕실해군(Royal Navy)이 심각한 함정 부족 사태로 인해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임무 수행을 위한 기함을 독일에서 빌려 쓰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26일(현지 시각) 영국의 ‘아이 페이퍼(The i Paper)’와 폴란드 군사 전문 매체 디펜스24(Defence24) 보도에 따르면, 영국은 오는 4월부터 NATO 제1상설해상그룹(SNMG1)의 지휘권을 인수할 예정이었으나 이를 수행할 가용 함정이 없어 독일 해군의 작센(FGS Sachsen)급 프레깃함을 기함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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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력 공백의 직접적인 원인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중동 정세다. 디펜스24는 키프로스 내 영국군 기지가 드론 공격을 받는 비상사태가 발생하자, 영국 국방부가 당초 NATO 임무에 투입하려던 45형(Type 45) 구축함 'HMS 드래곤(Dragon)'호를 동지중해로 긴급 회항시켰다고 전했다.
문제는 드래곤호가 빠져나간 자리를 채울 대체 전력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현재 영국이 보유한 45형 구축함 6척 중 작전 가능한 함정은 단 2척뿐이다. 'HMS 던컨(Duncan)'은 북극해에서 진행 중인 '파이어크레스트(Firecrest)' 작전에 투입됐고, 'HMS 데어링(Daring)'은 수년간의 수리를 마치고 이제 막 해상 시험에 들어갔다. 나머지 함정들 역시 현대화 개량이나 정비 단계에 묶여 있어 즉각 출격이 불가능한 상태다. 결국 영국은 지휘관만 보낼 뿐, 정작 '배'는 남의 것을 빌려 타는 굴욕적인 지휘권을 행사하게 됐다.

"더 이상 바다를 지배하지 못한다" 정계 비난 봇물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영국 정계에서는 "국가적 수치(National Shame)"라는 격렬한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보수당 의원이자 군인 출신인 벤 오베세 젝티(Ben Obese-Jecty)는 "왕실해군에 배가 없다는 것은 국가적 망신이다. 영국은 확실히 더 이상 바다를 지배하지 못하고 있다"며 날을 세웠다. 그는 과거 노동당 정부가 45형 구축함 도입 수량을 당초 12척에서 6척으로 반 토막 낸 결정이 오늘날의 화근이 됐다고 비판했다.

전 왕실해군 참모총장인 웨스트 경(Lord West)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해군은 국민이 기대하는 역할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며 "호르무즈 해협 봉쇄 사태 등은 해군력이 국가 안보에 얼마나 직결되는지 보여주지만,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상태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국방비 지출을 최우선 순위로 격상해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했다.

영국 45형 구축함 가동 현황. 인포그래픽=글로벌이코노믹/구글 제미나이이미지 확대보기
영국 45형 구축함 가동 현황. 인포그래픽=글로벌이코노믹/구글 제미나이


독일 국방장관의 '지원사격'과 묘한 기류

독일 측은 이번 사태를 '긴밀한 파트너십'으로 포장하고 나섰다. 보리스 피스토리우스(Boris Pistorius) 독일 국방장관은 싱가포르 방문 중 존 힐리(John Healey) 영국 국방장관과 직접 협의해 작센급 프레깃함(F219) 파견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런던 주재 독일 대사관 역시 X(옛 트위터)를 통해 "독일이 NATO 체제 하에 북대서양에서 군사적 주도권을 넓히고 있다"며 이번 지원이 양국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이 영국의 '대국(Great Power)' 지위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을 던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1850억 달러 규모의 미 '골든돔' 프로젝트 등에 테크 기업들이 가세하며 첨단화에 열을 올리는 사이, 정작 전통의 해군 강국 영국은 기본 자산인 '함정 수' 부족으로 동맹국에 손을 벌리는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노정용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noja@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