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단계적 종전안' 제시… 핵 협상 후순위 배치, 트럼프 안보팀 긴급 검토
푸틴, 아라그치와 회담서 이란 지지 천명… 한국 에너지 공급망 재편 불가피
푸틴, 아라그치와 회담서 이란 지지 천명… 한국 에너지 공급망 재편 불가피
이미지 확대보기28일 현재, 미국과 이란 간의 호르무즈 해협 종전 협상이 다시 교착 상태에 빠진 가운데, 이란이 핵 문제를 후순위로 미루고 전쟁 종식과 봉쇄 해제를 먼저 타결하자는 '단계적 종전안'을 내놨다.
CNBC, BBC, 월스트리트저널, 알자지라 등 주요 외신의 27일(현지시각) 보도를 종합하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안보팀과 긴급회의를 열어 이 제안을 검토했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란 외무장관 아바스 아라그치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나 전폭적 지지를 선언했다.
국제 원유 시장에서는 브렌트유 선물 가격이 배럴당 108.23달러(약 15만 9639원)까지 치솟으며 에너지 시장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수입 원유의 95%가 호르무즈 해협을 거치는 한국은 이 협상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란 '단계적 종전안' 제시… 트럼프 안보팀 검토 착수
이란 측 고위 소식통들은 로이터에 이 제안의 골자를 전했다. 1단계는 미국·이스라엘의 대이란 전쟁을 완전히 종식하고 재개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확보하는 것, 2단계는 미국의 이란 항구 봉쇄를 해제하고 호르무즈 해협 통항 문제를 해결하는 것, 마지막 단계에서 핵 협상과 여타 현안을 논의하는 구조다.
이란이 그동안 협상의 핵심 조건으로 내세운 핵 문제를 의도적으로 후순위에 배치한 점이 눈에 띈다.
트럼프 대통령은 25일(현지시각) 쿠슈너와 위트코프 특사의 이슬라마바드 방문을 전격 취소하며 "시간 낭비이고 할 일이 너무 많다"고 일축했다. 트루스소셜에는 "우리가 모든 패를 쥐고 있다"고 썼다. 그러나 취소 직후 이란으로부터 "훨씬 나은 제안이 왔다"고 밝히며 여운을 남겼다.
카롤린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27일 정례 브리핑에서 "대통령이 오전에 안보팀과 회의를 했고 이 제안이 논의됐다"고 확인했다. 다만 "대통령의 이란에 대한 레드라인은 이미 충분히 분명하게 전달됐다"며 구체적 검토 방향에는 말을 아꼈다.
마르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이날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이란 제안에 차가운 시각을 드러냈다. "이란이 해협을 열겠다는 것은 '우리와 협력하고 허가를 받으면 통과시켜 주겠다, 아니면 폭파하겠다'는 뜻"이라며 "그것은 개방이 아니다.
국제 수로에서 이란이 통행 허가권을 정상화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루비오 장관은 이어 "이란이 협상을 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부 깊은 균열이 타결의 최대 걸림돌"이라며 "강경 신학 세력과 경제를 돌봐야 하는 강경파 사이에서 분열이 심화됐다"고 분석했다.
파키스탄 당국자들은 원격 협상은 계속되고 있지만, 양측이 합의 각서에 서명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지기 전까지는 이슬라마바드 회담 재개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푸틴, 아라그치 면담서 "이란 용기 있게 싸우고 있다" 전폭 지지
협상 교착 속에 러시아가 이란의 든든한 후견인으로 나서며 외교 지형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27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보리스 옐친 대통령 도서관에서 아라그치 이란 외무장관을 만나 "이란 국민이 얼마나 용기 있고 영웅적으로 독립과 주권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우리는 본다"고 치하했다.
그는 이란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평화를 맞이하기를 바란다며 "우리 편에서는 귀국과 지역 모든 국민의 이익을 위해 가능한 빨리 평화를 이루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이란의 새 최고지도자 모흐타바 하메네이로부터 지난주 메시지를 받았다고 언급하며, 아라그치에게 러시아가 이란과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계속 이어갈 것이라는 뜻을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20년 전략 협력 협정은 지난해 체결됐다. 러시아는 현재 이란 유일의 핵발전소인 부셰르에 신규 원자로 2기를 건설 중이며, 이란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작전에 사용되는 샤헤드 드론을 공급해 왔다.
아라그치는 회담에서 "이란이 어려운 시기에 러시아 같은 친구이자 동맹국을 두고 있다는 것이 모든 이에게 증명됐다"고 말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러시아는 미국과 이란이 협상을 계속하기를 바란다"며 군사 행동 재개는 어느 편의 이익에도 맞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아라그치는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미국이 자국의 목표를 단 하나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협상을 요청해 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앞서 이란의 농축 우라늄을 보관하겠다는 제안도 내놓은 바 있으나 미국이 거부했다.
러시아는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을 강력히 비난하면서 중재자로 나서려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전쟁 특수로 에너지 수출 수입이 급증한 상황에서 러시아의 전략적 이해관계도 이란전쟁 장기화와 맞닿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브렌트유 배럴당 108달러 돌파… 전쟁 전 대비 55% 폭등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두 달째 이어지면서 국제 에너지 시장은 사상 최대 공급 충격을 겪고 있다.
CNBC에 따르면 27일 브렌트유 선물 6월물은 배럴당 108.23달러(약 15만 9639원)에 마감했다. 전쟁 발발 전인 올해 2월 말 배럴당 72달러 수준에서 55% 이상 오른 것이다.
미국 서부텍사스산 중질유(WTI) 역시 96.37달러(약 14만 2145원)를 기록했다. ING 은행 원자재 전략 수석 워렌 패터슨은 "평화 협상이 무산되면서 에너지 흐름 재개 기대가 사라졌다. 매일 시장이 타이트해지고 있어 유가가 더 높은 수준으로 재정가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이번 호르무즈 봉쇄를 "국제 원유 시장 역사상 최대 공급 차질"로 규정했다.
전세계 원유 해상 수송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이 길목이 막히면서, 선박 추적 업체 클플러(Kpler)의 자료에 따르면 하루 125~140척에 달하던 통항 선박은 전날 기준 단 7척으로 급감했으며 그나마도 세계 시장에 공급되는 원유를 실은 유조선은 한 척도 없었다.
이란 혁명수비대(IRGC)는 최근 컨테이너선 2척을 호르무즈 해협 인근에서 나포했으며, 현재 호르무즈섬 인근에 억류 중인 것이 위성 영상으로 확인됐다.
미국 중부사령부는 지금까지 이란 선박 38척을 차단하거나 회항시켰다고 밝혔다. 이란 외무부는 미국의 조치를 "공해에서의 노골적인 약탈 행위"로 규정해 비난했다.
전쟁 보험 시장도 요동치고 있다. 보험중개사 마쉬(Marsh)에 따르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에 대한 전쟁 위험 보험료율이 선박 가치의 3~8% 수준이다. 평시의 0.25%와 비교하면 최대 32배에 달한다. 한편 레바논에서도 이스라엘의 공습이 이어지며 29일 기준 사망자가 2521명으로 늘었다.
한국, 에너지 동맥 막혀… 공급망 대전환 가속
지난 3월 국내 원유 수입에서 미국산이 차지하는 금액은 전년 대비 75.8% 급증하며 1년 8개월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고, 나프타 수입에서는 미국산이 무려 57배나 늘었다.
중동산 원유 비중은 지난해 3월 73%에서 올해 3월 62.9%로 10%포인트 내려갔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가 사용하는 헬륨은 최대 수입처인 카타르산 수입이 30.1% 줄었고, 이란 드론 공격으로 카타르 최대 헬륨 산업단지가 가동을 멈추면서 글로벌 헬륨 가격은 50% 가까이 폭등한 상태다. 나프타의 중동 의존도는 석유화학 산업 전반에 연쇄 타격을 주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현재까지 원유와 주요 석유화학 원료, 헬륨 수급에 차질은 없는 상황"이라며 "공급망에 이상이 생길 경우 신속히 대체 수입선을 확보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비축유 9천만 배럴 방출과 함께 에너지 공급망 대체국 확보를 위한 외교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협상 전망 — '해협 먼저, 핵은 나중' 수용 여부가 관건
향후 협상의 핵심은 이란의 단계적 제안을 미국이 받아들이느냐다.
전직 미국 고위 관리 헨리 엔셔는 알자지라 인터뷰에서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이 최우선 의제가 돼야 한다"며 "핵 문제는 해결이 어렵지만 해협 문제는 더 빨리 풀 수 있어,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 제안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조건 없는 해협 개방은 이란의 전략적 승리로 볼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반면 전직 미국 국무부 차관보 마크 키밋은 같은 방송에서 "이란이 해협을 무기화한 뒤 이것을 협상 카드로 되돌려주는 방식은 말이 안 된다. 미국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상품 분석기관 코모디티 콘텍스트의 로리 존스턴 창업자는 "해협이 재개방되더라도 즉각적인 유가 하락은 일시적에 그칠 것"이라며 "공급망 병목과 인프라 손상, 생산 차질이 겹쳐 브렌트유는 80~90달러(약 11만 8000~13만 2750원) 수준에서 당분간 안착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비탈(Vitol) 최고경영자 러셀 하디는 21일 "전쟁으로 원유 생산 손실이 이미 6억~7억 배럴에 달하고 종전 후에도 10억 배럴 손실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독일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미국이 이란전쟁에서 설득력 있는 전략을 갖고 있지 않으며 이란 지도부에 굴욕을 당하고 있다"며 "이란이 예상보다 강하고 협상을 매우 능숙하게 이끌고 있다"고 진단했다.
러시아까지 이란의 등 뒤에 서면서 협상 국면은 더욱 복잡해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주 어떤 결단을 내리느냐가 글로벌 에너지 시장과 한국 경제 전반에 직결되는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진형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