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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법원, 트럼프 ‘연준 장악’ 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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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법원, 트럼프 ‘연준 장악’ 제동

리사 쿡 해임 시도 막히며 케빈 워시 의장도 운신 폭 커져
대법 “연준은 독특한 역사적 지위”…중앙은행 독립성 방어선 확인
리사 쿡 미 연방준비제도 이사.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리사 쿡 미 연방준비제도 이사. 사진=로이터

미국 연방대법원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리사 쿡 연방준비제도 이사 해임 시도에 제동을 걸었다.

표면적인 승자는 자리를 지키게 된 쿡 이사지만 더 큰 수혜자는 케빈 워시 신임 연준 의장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대통령이 마음에 들지 않는 연준 이사를 해임해 이사회를 재편할 수 없다는 미국 최고 법원의 판단이 나오면서 워시 의장이 백악관 압박에서 벗어나 통화정책을 운용할 공간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29일(이하 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이날 미국 대법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쿡 이사를 즉시 해임할 권한이 없다고 5대4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쿡 이사는 트럼프 대통령의 해임 권한을 다투는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연준 이사회에 남아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됐다.

이번 사건은 미국 대통령이 연준 이사를 직접 해임하려 한 첫 사례다. 대통령이 연준에 금리 인하를 압박한 전례는 있었지만 통화정책에 참여하는 이사에 대한 해임을 시도한 것은 이례적이다.

◇ 쿡 지켰지만, 워시도 지켰다


이번 판결의 직접 당사자는 쿡 이사다. 그러나 WSJ는 이번 결정의 가장 큰 승자로 케빈 워시 연준 의장을 꼽았다.

워시 의장은 지난 5월 연준 의장에 취임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선택한 인물이지만, 의장 취임 직후부터 전임자인 제롬 파월 전 의장 말기에 불거진 핵심 질문을 떠안고 있었다. 대통령이 다툼이 있는 사유를 들어 연준 이사를 해임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였다.

대법원이 이 문제에서 연준의 손을 들어주면서 워시 의장은 한결 넓은 운신 폭을 갖게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이 금리 인하를 압박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이사를 해임하거나 충성파 인사를 앉혀 의장을 압박하는 방식은 크게 제한된다.
마크 스핀델 투자매니저는 “대통령이 연준 이사회를 충성파로 다시 채울 수 있게 되면 워시 의장이 통화정책 목표와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자신의 유산에 집중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 연준은 다른 독립기관과 달랐다


대법원은 같은 날 다른 독립기관 수장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해임 권한을 더 넓게 인정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연준에는 별도의 기준을 적용했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연준은 정책 결정에서 독특한 역사적 지위와 역할을 갖고 있다”고 판시했다. 이는 연준이 일반 행정기관과 달리 통화정책과 금융시장 안정, 물가와 고용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특수 기관이라는 판단이다.

연준법은 대통령이 연준 이사를 해임할 수 있다고 규정하지만 그 경우에도 ‘정당한 사유’가 있어야 한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대통령이 얇은 근거만으로 연준 이사를 해임할 수 있게 되면 앞으로 모든 연준 이사가 낮은 해임 문턱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제기한 의혹이 실제로 쿡 이사를 해임할 만큼 충분한 사유인지에 대해서는 최종 판단하지 않았다. 다만 쿡 이사에게 최소한 문제 된 증거에 대한 설명, 반박할 기회, 답변 기한이 제공돼야 한다고 봤다.

◇ 트럼프, 금리 인하 압박 속 해임 시도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쿡 이사가 과거 주택담보대출 신청 과정에서 복수의 주택을 주거용으로 신고해 유리한 대출 조건을 얻으려 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해임을 통보했다.

쿡 이사는 혐의를 부인했다. 그는 판결 뒤 성명에서 이번 사건이 오래전 대출 서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정치적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미국 국민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기준으로 금리를 결정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명분이라고 주장했다.

쿡 이사는 조 바이든 전 대통령 지명으로 지난 2022년 상원 인준을 받아 연준 이사가 됐다. 그는 연준의 신중한 금리 인하 기조를 지지해온 인사로 분류된다. 지난 5월 스탠퍼드대 경제정책연구소 연설에서도 기준금리를 유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경기 부양과 부채 부담 완화를 위해 연준에 더 빠르고 큰 폭의 금리 인하를 요구해왔다. 금리가 낮아지면 기업과 가계의 차입 비용이 줄고 주택담보대출과 자동차 대출, 신용카드 이자 부담도 낮아진다. 그러나 물가가 완전히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금리를 지나치게 빨리 내리면 인플레이션이 다시 고착될 수 있다.

◇ 대통령 압박 수단 하나 사라져


이번 판결이 연준에 대한 대통령의 모든 압박 수단을 없앤 것은 아니다. 대통령은 공개 발언과 인사권, 정치적 압박을 통해 연준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직접적인 수단 하나는 막혔다. 대통령이 의장이나 이사를 해임해 자신에게 우호적인 인사로 이사회를 채우고 기존 의장을 표결에서 밀어붙이는 방식은 이번 판결로 어려워졌다.

WSJ는 닉슨 행정부 시절 백악관이 아서 번스 당시 연준 의장에게 금리 인하를 압박했고, 연준 이사회 확대 가능성까지 거론했던 사례를 언급했다. 대통령이 연준 이사회의 구성을 흔들 수 있다면 통화정책 독립성은 크게 약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핀델은 대통령이 사소한 혐의를 꾸며 연준 이사를 해임하고 워시 의장 주변에 꼭두각시 같은 인사를 채울 수 있다면 워시 의장이 어떻게 기관을 운영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 정치적 공방은 계속될 가능성


다만 이번 결정으로 쿡 이사를 둘러싼 공방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사건은 하급심에서 계속 다뤄진다. 대법원 판결도 5대4로 갈렸기 때문에 향후 비슷한 사건에서 같은 기준이 유지될지에는 불확실성이 남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판결 직후 소셜미디어를 통해 대법원이 사건을 절차적 이유로 하급심에 돌려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쿡 이사가 미국 국민의 복지와 관련된 중대한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된다며 즉각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쿡 이사에 대한 압박도 이어질 조짐이다. 트럼프 대통령 측 인사인 빌 풀트는 판결 직후 쿡 이사가 모기지 사기 혐의로 기소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쿡 이사는 아직 범죄 혐의로 기소되지 않았다.

법무부가 과거 파월 전 의장을 압박했다는 논란도 있었다. 연준 청사 보수 비용 초과 문제와 관련한 형사 조사에서 소환장이 발부됐지만 연방 판사는 이를 기각했다. 파월은 해당 조사를 금리 인하 압박을 위한 명분으로 공개적으로 비판한 바 있다.

◇ 파월 잔류도 워시에 완충 역할


워시 의장의 통화정책 환경은 복잡하다. 파월 전 의장은 의장직에서는 물러났지만 2028년까지 보장된 연준 이사직은 유지하고 있다. 최근 관례와는 다른 선택이다.

파월의 잔류는 워시 의장에게 부담이자 완충 장치가 될 수 있다. 전임 의장의 존재가 현 의장을 가릴 수 있지만 동시에 트럼프 대통령이 새 이사를 지명할 기회를 하나 줄이는 효과도 있다.

만약 파월이 이사직에서 물러났다면 트럼프 대통령은 더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지지하는 인사를 지명할 수 있었다. 그런 인사가 금리 인하를 요구하며 반대표를 던지면 워시 의장은 백악관과 시장, FOMC 내부 사이에서 더 어려운 선택을 해야 했을 수 있다.

스티븐 미런 전 연준 이사는 지난해 9월 이후 참석한 여섯 차례 회의에서 모두 더 완화적인 정책을 주장하며 반대표를 던진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비슷한 성향의 인사를 다시 앉힌다면 워시 의장은 금리 인하 압박을 더 강하게 받을 수 있다.

◇ 금리 인하 대신 인상 논의 가능성도


대법원 판결로 법적 방어선은 강화됐지만 워시 의장이 직면한 정책 과제는 더 어려워졌다. 연준 내부에서는 강한 경제 성장과 끈적한 물가가 이어질 경우 올해 말 금리 인하가 아니라 금리 인상 논의가 필요할 수 있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방향과 정반대다. 트럼프 대통령은 더 낮은 금리를 원하지만, 연준이 물가 안정 목표를 중시한다면 금리 동결이나 인상이 불가피할 수 있다.

시장도 이 지점을 주목하고 있다. 워시 의장이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한 인사라는 이유만으로 완화적 통화정책을 밀어붙인다면 연준의 신뢰가 흔들릴 수 있다. 반대로 물가와 고용 지표에 따라 독립적으로 판단한다면 백악관과 충돌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번 판결은 워시 의장이 그런 충돌 속에서도 제도적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신호다. 대통령이 의장 주변의 이사들을 해임해 표결 구도를 바꾸는 방식은 제약을 받게 됐다.

◇ 중앙은행 독립성의 방어선


이번 사건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정치적 패배이자 연준 독립성에는 중요한 방어선으로 평가된다. 대법원은 대통령 권한 확대 흐름 속에서도 금리를 결정하는 중앙은행에 대해서는 다른 기준을 적용했다.

리사 쿡 이사는 당분간 자리를 지키게 됐다. 그러나 이번 판결의 의미는 개인의 직무 유지에 그치지 않는다. 대통령이 연준 이사를 해임해 통화정책 방향을 바꾸려 할 때 법원이 어디까지 제동을 걸 수 있는지 보여준 첫 시험대였다.

워시 의장에게도 이번 결정은 중요한 안전판이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선택한 의장이지만, 연준 의장으로서의 평가는 백악관의 요구가 아니라 물가와 고용, 금융시장 안정이라는 법적 책무를 얼마나 독립적으로 수행하느냐에 달려 있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로 연준이 일반 독립기관과 다르다는 점을 다시 확인했다. 연준을 둘러싼 법적·정치적 공방은 계속되겠지만 적어도 대통령이 해임권을 앞세워 중앙은행 이사회를 마음대로 재편하는 길에는 분명한 제동이 걸렸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