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잭슨홀의 연막작전
티턴산 잭슨홀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전 세계 금융시장의 모든 눈과 귀가 단상 위에 오른 제17대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케빈 워시의 입술에 쏠렸다. 마이크를 잡은 그의 표정은 엄숙했고 목소리는 차가웠다.
"물가가 확실히 잡힐 때까지 연준은 결코 경계를 늦추지 않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긴축의 고삐를 더 죌 준비가 되어 있다." 장내에 서늘한 침묵이 흘렀다. 언론들은 일제히 '워시의 매파 본색', '긴축 장기화'라는 헤드라인을 타전했다. 월스트리트의 노련한 큰손들은 모니터 뒤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은 워시가 던진 '매파 코스프레'의 진짜 의도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이 엄포는 시장의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를 억누르기 위한 고도의 연막작전이자 정치적 알리바이일 뿐이다. 워시의 진짜 목표는 고금리의 족쇄를 과감히 풀어헤치고, 막대한 유동성과 감세, 규제 완화를 융합해 미국 경제를 '초호황의 질주'로 이끄는 데 있다. 그는 겉으로는 가장 엄격한 원칙주의 매파의 탈을 쓰고 있지만, 속내는 그 누구보다 거대한 돈 풀기와 경제 성장을 갈망하는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치밀하고 영악한 대왕 비둘기'다.
스탠퍼드와 하버드, 그리고 모건스탠리 M&A의 야전사령관
1970년 뉴욕주 올버니에서 태어난 케빈 워시는 미국 최상위 지배 엘리트의 길을 정석대로 걸어왔다.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공공정책학과를 마치고, 하버드 로스쿨로 진학해 1995년 법무석사(J.D.) 학위를 손에 쥐었다. 여기에 MIT 슬론 경영대학원에서 금융 과정을 이수하며 법률 규제와 자본시장의 공학적 메커니즘을 맛보았다.
그동안 미국 중안응행인 연준은 정통 경제학자가 그 수장을 맡아온 게 전통이었다. 워시는 그런 정통 경제학자가 아니다. 경제학과는 직접적인 인연이 없다. 로스쿨을 졸업한후 월스트리트의 심장부인 모건스탠리에 입사했다. 수십억 달러가 오가는 기업 인수합병(M&A), 구조조정, 대규모 자본 조달의 최전선에서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며 30대 초반에 M&A 부문 부사장(Executive Director)에 올랐다.
기업이 값싼 자본을 만나 혁신을 일으킬 때 주가가 어떻게 폭발하고 경제가 어떻게 팽창하는지 현장에서 나름 체득한 인물이다. 현장 경험이 있다는 점에서 실전형으로 불린다. 경제학계는 그러나 워시의 경제학적 기본이 아예 없거나 기초가 약하다면 우려를 표하고 있다.
35세 최연소 연준 이사
이후 스탠퍼드 후버연구소와 전설적 헤지펀드 투자자 스탠리 드러켄밀러의 듀케인 패밀리오피스에서 파트너로 활동하며, 그는 민간 자본의 야성을 극대화할 진짜 '슈퍼 비둘기형 금융 설계도'를 완성해 나갔다.
에스티 로더 가문과 유대계 메가 자본
케빈 워시라는 인물의 무서운 파괴력은 그의 뒤를 받치고 있는 거대한 혼맥과 유대계 글로벌 네트워크에서 나온다. 워시의 아내 제인 로더(Jane Lauder)는 세계적인 화장품 제국 에스티 로더 창업자의 친손녀이자 핵심 상속녀다. 하지만 진짜 거물은 그의 장인인 로널드 로더(Ronald Lauder)다. 전 오스트리아 대사이자 전 세계 유대인 커뮤니티의 최고위 권력 기구인 세계유대인회의(WJC) 회장을 장기간 맡고 있는 로널드 로더는, 미국 공화당 정계의 최대 자금줄이자 워싱턴과 뉴욕의 권력을 막후에서 쥐고 흔드는 킹메이커다.
여기에 스탠리 드러켄밀러를 비롯한 월가 유대계 헤지펀드 거물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얽혀 있다. 워시는 단순한 관료가 아니다. 월스트리트의 거대 투기 자본, 공화당 보수 정계, 글로벌 유대계 네트워크의 교차점에 서 있는 황태자다. 이 네트워크가 원하는 것은 명확하다. 바로 강력한 달러의 외피 속에 숨겨진 '유동성의 대폭발'과 '자산 가격의 대세 상승'이다. 워시는 이들의 열망을 정책으로 실현할 가장 완벽한 대리인이다.
트럼프와의 밀약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케빈 워시의 결합은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치밀한 정경유착적 정책 동맹이다. 트럼프는 부동산 개발업자 시절부터 로널드 로더와 호형호제하던 사이였고, 일찌감치 워시의 현실 감각과 대중적 스타성을 눈여겨보았다.트럼프 2기 행정부가 워시를 연준 의장으로 낙점한 이유는 자명하다. 트럼프의 지상 과제인 '미국 제조업 르네상스'와 '압도적 경제 성장'을 달성하려면 반드시 초저금리와 막대한 자본 투자가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워시는 트럼프에게 완벽한 해법을 제시했다. 연준 의장이 대놓고 "금리를 내리겠다"고 떠들면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가 번져 시장 금리가 튀어 오르고 달러가 폭락한다. 따라서 겉으로는 무시무시한 '매파 코스프레'로 인플레 파이터 행세를 하며 시장의 헛바람을 빼놓고, 실제로는 뒤편에서 금융 규제를 철폐하고 실질금리를 급격히 낮춰 경기 부양의 고속도로를 닦는 전략이다. 트럼프와 워시는 이 '매파 연출, 비둘기 집행'의 연극을 완벽하게 합작하고 있다.
대왕 비둘기
케빈 워시를 매파라고 부르는 것은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그의 경제 철학인 '신공급주의(New Supply-Side Economics)'는 본질적으로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친성장·통화 완화론이다. 첫째, 생산성 혁신을 핑계로 한 무제한 완화다. 워시는 인공지능(AI), 반도체, 에너지 자립 등 미국의 첨단 혁신 기업들이 생산성을 폭발시키면 물가는 저절로 안정된다고 믿는다. 공급 능력이 늘어나 물가가 구조적으로 잡히므로, 기준금리를 높은 수준에 둘 이유가 전혀 없으며 경제가 과열될 때까지 마음껏 돈을 풀어도 무방하다는 논리다.
둘째, 은행 자본 규제의 전면 철폐를 통한 민간 유동성 폭격이다. 그는 과거 연준이 은행들의 손발을 묶어놓은 규제를 걷어내고 있다. 중앙은행이 국채를 사지 않더라도, 월가의 민간 은행들이 기업과 주식시장으로 천문학적인 대출을 쏟아내도록 유동성의 수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방식이다.
셋째, 고성장·친기업 드라이브다. 그는 실업률이 낮아지면 물가가 오른다는 낡은 필립스 곡선 이론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노동시장이 뜨거워지고 임금이 올라도 혁신을 통해 흡수할 수 있으므로, 고금리로 경기를 억누르는 것은 '중앙은행의 범죄'라고 본다.
케빈 워시의 진짜 얼굴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투자자는 앞으로 펼쳐질 거대한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다. 잭슨홀에서 그가 쏟아낸 서슬 퍼런 경고는 양의 탈을 쓴 늑대, 아니 '매의 가죽을 뒤집어쓴 대왕 비둘기'의 영리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그는 월가의 탐욕과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베테랑이다. 전 세계 시장을 향해 매파의 으름장을 놓으며 인플레이션 심리를 잠재운 뒤, 밑바닥에서는 금리 인하와 유동성 공급의 거대한 파도를 밀어 넣고 있다. 서슬 퍼런 매파의 입술 뒤에 숨겨진 대왕 비둘기의 날갯짓이 세계경제에 어떤 파장을 몰고올지 주목된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