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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재와 자선 사이…지금도 평가 어려운 문제적 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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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재와 자선 사이…지금도 평가 어려운 문제적 부호

[존경받는 천상부자]⑦ 존 데이비드 록펠러

[글로벌이코노믹=김종길 기자] 그가 왜 ‘존경받는 천상부자’에 포함돼야 하는지 많은 반론이 예상된다. 그 비난을 수용해야 할만큼 소위 '욕먹을 짓'을 많이 했지만 무턱대고 비판하기에는 그가 행한 ‘선행’의 그림자가 곳곳에 너무 넓게 퍼져있다. 그래서 결코 평가가 쉽지 않은 인물이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10억달러 이상의 자산을 축적한 인물로 그 자산 규모를 실질가치로 계산하면 미국 역대 최고의 부자로 추정된다.

엄청난 기부금을 낸 자선사업가이면서 기업인으로서는 무자비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약품 행상으로 먹고사는 가난한 이였지만 자식만은 엄하게 키웠다. 그 가르침 때문이었던지 부모에게 효도하며 성실을 모토로 살았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서 가장 큰 가치로 여긴 것은 결국 돈이었다. 열 두 살 때 자신의 저축액 중 50달러를 아는 사람에게 이자를 받고 빌려주면서 노동보다는 자본이 더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19세기판 피케티 이론을 깨닫는다. 그 벌거벗은 진실을 마주한 록펠러는 농산물 중개 등으로 사업자금을 마련한 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불과 24세 나이로 석유정제업에 뛰어들었다. 회사명 스탠다드석유다. 록펠러는 효율적 경영과 경쟁상대 걷어차기 전략으로 많은 동업회사를 흡수합병하고 스탠다드석유를 최대 정유회사로 키운다. 1870년에는 미국 정유산업 점유율 10%의 스탠다드석유는 187990%를 독점하는 회사로 성장한다. 그의 나이 겨우 39살 때의 일이다.
아무런 도덕적 가책 없이 타 기업을 흡수·통합하고 돈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악덕 기업가였다. 술도 여자도 음악, 미술 감상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재산 가치는 현재 세계 최고 거부라는 빌 게이츠 재산의 최소 2배, 최대 3배에 달한다고 한다.

돈 외에 그의 인생을 지배한 가치가 하나 더 있다면 바로 종교다. 겨우 주급 4달러를 받던 시절부터 수입의 10%를 헌금으로 평생을 냈고 술이 나오는 행사에는 아예 가지 않을 정도의 독실한 신자(침례교)였다. 엄청나게 축적된 부의 황홀감에 깔려 죽을 상황에서 프레데릭 게이츠라는 이름의 목사가 그에게 자선을 권하고 그 방법을 알려준다. 게이츠 목사는 록펠러의 이름을 딴 자선단체와 미국 최초의 의학연구소를 설립하고, 교육사업 투자 등을 통해 실추될대로 실추된 록펠러의 이미지를 자비로운 자선사업가로 바꿔놓았다. 록펠러가 55세에 불치병 선고를 받지만 이후 나눔과 베풂을 통한 선한 삶을 통해 43년을 더 살았는데 그 비결이 게이츠 목사의 설교 덕분이었다는 상당히 종교적인 이야기도 전해온다.

하지만 록펠러 가문의 이미지 개선에 힘썼던 인물은 외아들 록펠러 2세다. 그는 시카고대학, 록펠러 의료재단, 록펠러 연구소 등을 설립하며 가문의 오명을 쇄신했다. 자선사업에 헌신하며 록펠러 가문의 전성기를 이룬다. 재단을 세워 문화예술, 교육, 의료 전반에 걸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설립 이후 당시 25억달러 상당의 자금을 재단을 통해 제공했다. 록펠러2세의 이같은 노력에 힘입어 가문은 명문가로 재부상한다. 당시의 이같은 기부와 환원은 서구사회 기부문화의 뿌리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록펠러는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을 향해 이주민들이 몰려들던 골드러시, 즉 서부 개척시대의 초창기를 지켜봤다. 돈에 대해서는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1855년 클리블랜드 센트럴고교 졸업 후 그해 9휴이트 앤드 터틀이라는 회사에 경리과 직원으로 입사해 회계장부를 기입하게 된 일이다. 이후 그의 인생에서 오로지 회계장부만이 그의 인생 자체였다. 돈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장부를 기록했으며 단 1달러에도 소홀함 없이 수입과 지출을 적고 저축과 투자를 해나갔다. 심지어는 자선까지...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금인 10만달러의 기부금을 교회에 내고도 목사로부터 더러운 돈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할만큼 악명이 높았다. 더러운 돈이라는 말은 당시 사회의 유행어가 됐다. 실제로 그는 더러웠다. 경쟁 석유회사 송유관을 파괴하고 유령회사를 설립해 록펠러에 대항하려면 회사를 합챠야 한다고 꼬여 다른 회사를 꿀꺽했다. 자선재단을 세웠을 때 당시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아무리 큰 선행을 해도 이전의 악행을 덮지 못할 것이라고 악평을 할 정도였다. 한 신문이 모자를 들고 도와달라고 구걸하는 거지를 외면하는 록펠러의 모습을 크게 실으면서 그는 탐욕에 가득찬 부자의 상징처럼 돼 버렸다.

하지만 노년의 그는 왼손 몰래 오른손으로 무수히 많은 기부를 했다. 또 그 유명한 록펠러재단을 세웠다. 시카고대학, 록펠러대학 설립자의 이름 역시 '존 데이비드 록펠러'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명단에 단골로 등장하는 것이 시카고대학 출신들이고 1969년 노벨경제학상 시상이 시작된 후 수상자 74명 중 12명이 시카고 학파라니 그의 기부가 사회 발전에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의학적으로도 록펠러의 기부금이 구충과 황열의 퇴치에 큰 역할을 했다니 인류에게도 나름의 큰 기여를 한 것이다. 독자에게 재차 묻는다. 그는 존경받을 천상부자인가? 어떤 선행으로도 악을 덮을 수 없는 탐욕의 상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