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도 임종하기 직전에 하인에게 립스틱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뒤에 스스로 붉은색 루즈를 발랐다는 오래된 기록이 있다. 그런가하면 악명 높은 네로황제의 아내 포파에아 사비나는 100명의 수행원으로 구성된 글램 스쿼드(패션스타일리스트)를 데리고 다니면서 입술이 항상 신선하게 칠해졌는지 확인한 정도로 루즈에 신경을 많이 썼다.
단단한 립스틱의 발명은 서기 9년경 아랍과학자 아불카시스가 향수 스톡을 만들다가 실수로 발명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쯤 되면 “립스틱은 여인의 강력한 무기”라는 21세기의 최대 화장품회사의 광고 카피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게 한다. 여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는 루즈 이야기는 5000년 전, 이라크 우르 시의 수메르 여왕 화장대에서 시작된다. 푸아비 여왕의 이야기는 켜켜이 접힌 시간의 주름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녀는 역사에 립스틱을 처음 사용한 여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메소포타미아 초기 문명시대에 존경받던 푸아비 여왕은 정교한 머리 장식과 장신구가 특징이었지만 외모의 핵심은 립스틱이었다. 푸아비 여왕은 붉은 바위와 백납으로 만든 밝은색 루즈를 입술에 발랐다.
약 2000년 전, 고대 이집트에서는 루즈의 원료로 홍당무를 사용했다. 뜨거운 사막에서 얼굴 보호를 위해 뺨에 붉은 황토색을 발랐다는 기록도 함께 쓰여 있다. 루즈의 원료는 시대별로 다양하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풍뎅이 딱정벌레가 쓰였고, 그리스는 붉은 염료와 와인 잔여물, 양의 땀, 인간의 타액, 심지어 악어의 배설물을 재료로 즉석에서 만들었다. 로마제국은 뽕나무, 레몬, 장미 꽃잎, 와인 잔여물을 썼다.
중세 유럽의 암시장에서는 으깬 붉은 뿌리, 장미 꽃잎, 양 지방 등으로 장밋빛 립 루즈를 만들었다. 서구에서 가장 번영했던 도시 베니스의 상류층 여성들은 밝은 핑크 립 루즈를 발랐고, 영국 에드워드 4세 궁정의 여성과 남성들은 모두 립 루즈를 발랐다.
립 루즈 신봉자인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자신만의 레시피를 가지고 있었다. 여왕은 석고와 색상을 혼합하고 페이스트를 연필 모양으로 굴려 햇볕에 말린 립 펜슬을 발명했다고 한다. 그녀는 립스틱이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믿을 정도로 립스틱에 열광했다.
전쟁 기간에도 루즈는 성행했다. 유럽은 전시체제가 되자 여인들에게 립스틱을 배급했다. 가장 극성스런 루즈 애용은 미국인들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립스틱은 전쟁 노력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미국인들은 전쟁 물자를 만드는 공장 탈의실에 립스틱을 가득 채웠다고 한다. 게다가 여성 해병대는 그들만의 특유 공간인 ‘붉은 새’로 일컬는 몽테주마 레드(Montezuma Red)존을 가졌다고 한다.
기발한 루즈 형태도 탄생했다. 쌍안경으로 위장하거나 정전을 대비한 비상 손전등을 장착한 립스틱을 말한다.
여인들이 사랑하는 루즈는 철과 연관이 깊다. 철이 제 몸을 부패시켜 발생하는 ‘녹’이 루즈의 붉은 빛깔을 내는 원료로 사용된다. 녹에서는 붉은 빛깔만 추출해 내는데 이 빛깔 속에 함유된 철 성분은 극히 미량이어서 인체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 다만 꽃잎이나 식물성 원료대비 투입비용이 너무 과다해 최근에는 극히 소량의 수요만 이뤄진다.
쇠의 녹은 루즈 이외에 냉장고나 자동차에도 활용된다. 녹에는 자성체(磁性體)성분이 가장 많이 함유되어 있어 페라이트 산업을 발전시켰다. 오래전 (주)창원(동국산업 합병)에서는 월 약 200여 톤의 ‘녹’을 사들였다. 이 녹으로 페라이트의 성품을 만들었다.
페라이트는 분말화한 자성물질을 일컫는다. 한국은 부족한 산화철을 러시아와 동구라파에서 수입해왔다. ‘쇠의 녹’이 다량 발생하는 곳은 단순압연 철강공장이다. 냉연철강 제품의 원료인 핫 코일 표면에 자리 잡은 녹을 산세 작업을 통해 털어낼 때 ‘산화철’이 제법 쌓인다.
동국제강 부산공장에서는 월간 약 400만~500만t의 산화철이 발생한다. 이 산화철을 페라이트로 생성하기 위해서는 불로 녹이고 분말 가루로 만드는 제조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선 선화철에 탄산바륨과 스트론좀을 90대10이나 80대 20의 비율로 혼합시키고 길이 22m의 ‘로타리 킬린’(회전가마)에서 섭씨 1200도로 가열시킨다. 분말이 1마이크론(1,000분의 1mm)의 크기로 분쇄되면 PVA(폴리비닐 알코올)와 섞어 성형된 과립형태의 페라이트가 만들어 진다.
페라이트는 소형 모터에 가장 많이 쓰인다. 자동차 윈도우 브러쉬나 음향기기의 안테나 등 자동으로 조작하는 소형 모터에 사용된다. 장난감과 같은 소형 모터에도 페라이트가 사용된다.
냉장고의 문을 여닫을 때 맞닿는 부분(고무형태)이 잘 부착 되는 이유는 바로 페라이트를 함유했기 때문이다. 철광석에서 철이란 이름을 달고 세상살이를 시작하는 철은 태워서 연기로 없어질 때까지 인간 생활의 문명의 이기로 사용되는 소중한 물질이다.
김종대 글로벌이코노믹 철강문화원장
김종대 글로벌i코드 편집위원 jdkim871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