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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의 철태만상(15)] 다시 혁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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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의 철태만상(15)] 다시 혁신해야 한다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 포스코 포항제철소 제1고로에서 첫 출선에 성공한 뒤 박태준 명예회장(가운데)을 비롯한 포스코 직원들이 만세를 외치며 환호하고 있다. 사진=포스코이미지 확대보기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 포스코 포항제철소 제1고로에서 첫 출선에 성공한 뒤 박태준 명예회장(가운데)을 비롯한 포스코 직원들이 만세를 외치며 환호하고 있다. 사진=포스코
고로(용광로) 메이커는 철강 산업계의 골리앗이다. 천하무적의 골리앗을 엎어치기 한 판으로 제압한 다윗은 전기로 메이커다. 전 세계 철강 시장을 주무르고 있는 막강한 전기로 메이커들은 미국의 뉴코와 SDI, 세베스탈 콜럼뻐스(Severstal Columbus)와 일본의 동경제철 등이다.

전기로가 고로와 대적하려면 고로에서 생성되는 고품질의 쇳물을 양산해야 한다. 이 기업들은 전기로에서 고순도의 쇳물을 얻어냈다. 자동차용 강판을 생산할 수 없다는 전설 같은 과제를 해결한 것은 신 슬래브(Thin Slab)공법이다.

1980년대 중반 독일 SMS사가 개발한 이 기술을 적극 도입한 인물은 뉴코스틸의 전 회장 캔 아이버슨이다. 1989년 뉴코가 미국 크로포즈빌 공장에 처음으로 신슬래브 공법을 상용화 시킨지 벌써 34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신 슬래브 공법은 이제 세계 철강 산업을 주무르고 있다. 당시 혁신적인 전기로 강판 제조기술이 등장하자 고로 메이커들은 당황했다.

“고철을 더 많이 사들여라”
신 슬래브 공법의 원료가 철 스크랩(고철)이라는 점을 고로 메이커가 역습한 것이다. 철스크랩 가격은 잠시 급등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전기로 메이커의 한판 승리였다.

철강 산업이란 4각의 링 위에서 뉴코가 고로를 이긴 무기로 활용한 신슬래브 공법은 극한 도전 끝에 이뤄낸 쾌거다. 이 혁신적인 도전은 100년 이상 지배했던 세계 철강 시장을 완전히 뒤집었다. 고로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거나 죽거나 한다는 양자택일의 절박감에서 얻어진 결과물이다. 뉴코는 기술개발 당시 최고경영자부터 기술진, 그리고 현장 근무자에 이르기까지 휴대용 침대를 공장 한켠에 준비해두고 잠을 설치며 기술개발에 애썼다.

전략 선택의 중심에는 고로 메이커들이 지닌 구태의연한 관행적 사고를 타파하겠다는 의지가 숨어 있었다. 신슬래브 공법은 가지를 쳤다. 공장 건설에 참여했던 인물이 제2의 신슬래브공장을 도입한 철강기업 SDI를 창립했다. 이 철강기업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기술개발 당시 뉴코의 경영전략은 대략 10가지다. 가장 눈에 띄는 전략은 스피드 경영이다. 타 철강기업들은 15번의 과정을 거쳐야 결정되는 사안을 5단계로 대폭 줄였다. 그리고 범용제품에 집중했다. 공장 규모는 최대 1500만t 이내로 한정시켰다.

공장위치도 고객 가까이 두고, 지속적 M&A(인수‧합병)를 통해 하공정(다운스트림)을 확대했다. 공장별 독립경영을 통해 가격, 유통, 고객관리를 단순화시켰다. 작은 본사는 뉴코의 오늘을 만든 기업문화의 핵심이다.

한국에 전기로가 도입된 것은 1963년이다. 부산을 거점으로 했던 부산제철소가 12t급 1기를 도입한 것. 부산제철은 동국제강의 자회사였다. 1965년까지 연산 3만4000t의 쇳물을 생산했다. 1966년에 진입하면서 전기로 도입은 급물살을 탔다. 동국제강이 15t급 전기로 2기를 도입하고, 극동제강(현 YK스틸) 20t급 1기를 도입했다. 국내 전기로 조강생산량은 연산 22만t에 달했다.

전기로 이전에는 큐풀라와 같은 전근대적 가마에서 쇳물을 끓이느라 작업자들은 쇳물이 튀는 열악한 환경을 극복해야 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전기로는 더욱 확대되었다. 1971년 전기로 제강 생산능력은 43만t에 도달했다.

전기로의 등장은 국가 경제개발 계획을 성공시키는데 밑거름이 됐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한 1962년에는 7개의 제강 공장에서 14만8000t의 쇳물을 생산했다. 이 계획이 마무리되는 1967년에는 15개 공장에서 58만5000t의 제강생산 능력을 갖추게 됐다.

1971년에는 17개 공장에서 91만1000t으로 증가했다. 중화학 공업 성장과 국가 인프라 건설에 주력했던 정부는 철강 산업으로부터 철강재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었다. 당시 재계 순위에 동국제강이 3위에 링크될 정도로 전기로 메이커는 국가 경제에 막중한 역할을 했다.

지금 전기로 메이커에서 생산되는 철근 생산량은 1100만t을 상회한다. 철강 초창기와는 격세지감을 느낀다. 하지만 고로 메이커들이 친환경 설비로 전환하느라 위기를 느낀다고 자만할 일은 아니다.

지난 7월 4일 포스코의 제1제철소 완공 50주년을 지켜보는 감회는 혁신이라는 단어이다. 초창기 철강 산업을 이끌었던 철강 거인들의 혁신적 사고와 도전정신을 되새겨 볼 일이다.

“눈이 카메라야. 보는 족족 머리에 담았어.”


“일본 출장길에 철강 서적이 보이면 바로 찢어서 우리 기술진에게 전했지.”

“우린 맨손이니까 직접 들어야 돼. 동국제강 장상태 회장에게 많은 조언을 들었어. 철강은 나보다 한 수 위였거든.”

철강 거인 고(故) 박태준 포스코 설립 회장이 2001년 필자와 인터뷰에서 들려준 회고담이다. 그가 만든 포스코는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기업으로 성장했다. 민간 철강기업들도 규모의 성장을 이뤘다. 세월이 흐른 만큼 철강 산업도 어제의 기술로는 미래가 불안하다. 더 넉넉한 파워를 갖춰야 할 시기이다.

선배들이 이룩한 과실만 따 먹는 오늘의 철강인은 없겠지만…지금 철강 산업은 혁신과 도전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있다.

김종대 글로벌이코노믹 철강문화원장


김종대 글로벌i코드 편집위원 jdkim871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