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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숲 향기로 마음을 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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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숲 향기로 마음을 씻고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비 온 뒤의 숲 내음이 그리워 둘레길을 걸었다. 며칠 전에 보았던 꽃들의 안부도 궁금하기도 하고, 시시각각 달라지는 숲의 변화를 읽는 재미도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이다. 적당히 물기를 머금은 흙길은 부드럽게 내 몸무게를 받아주고, 비에 씻긴 신록들이 뿜어내는 초록 향기가 마스크에 갇혀 답답하기만 하던 숨통을 단숨에 확 트이게 해 준다. 겨우 숲 들머리를 지났을 뿐인데 나뭇가지 사이로 새들이 날고, 청솔모가 낯선 발소리에 황급히 나무 위로 몸을 숨긴다. 불어오는 바람결에 켜켜이 쌓인 낙엽들이 비에 젖어 발효되는 냄새와 들꽃의 달콤한 꽃향기가 어우러져 코끝을 간질인다.

우리는 단순하게 기분을 좋게 하고 쾌감을 주면 '향기(香氣, Aroma)'라 하고, 불쾌감을 주는 냄새를 '취기(臭氣, Stink)'라 한다. "향기는 코를 열게 하고 냄새는 창문을 닫게 한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우스개로 치부하기엔 향기와 취기의 차이에 대한 명확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한자의 향(香)이라는 글자는 벼(禾)가 햇빛(日)에 익어가는 냄새가 합쳐진 것이다. 농촌에서 나고 자란 덕분에 나는 그 냄새가 얼마나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는지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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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는 우리를 수천 미터 떨어진 곳에 많은 시간을 건너뛰어 데려다주는 힘센 마술사다. 과일 향기는 나를 남부의 고향으로, 복숭아과수원에서 장난치던 어린 시절로 둥실둥실 띄워 보낸다. 슬며시 일어났다 스러지는 다른 냄새들은 내 마음을 기쁘게 녹아내리게도 하고, 슬픈 가락에 움츠러들게도 만든다. 지금 냄새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에도 내 코는 가버린 여름과 멀리서 익어가는 곡식의 달콤한 기억을 일깨우는 향기로 가득 찬다."

미국의 시인이자 박물학자인 다이앤 애커먼의 저서 <감각의 박물학>에 나오는 '헬렌 켈러'의 말이다. 다이앤 애커먼은 냄새에 관한 한 단기적 기억은 없다고 했다. 어떤 인상적인 향을 맡으면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몸에 새긴 것처럼 영원히 기억한다고 한다. 어떤 향기가 순간적으로 스쳐 가면 마치 덤불 속에 감춰져 있던 지뢰가 폭발하듯 냄새의 뇌관을 건드리는 모든 추억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시각적 이미지가 감정을 건드리는 도화선이라면 시간과 장소를 기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후각은 추억의 뇌관을 터뜨리는 공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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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 뒤의 청신한 숲의 향기 속을 거닐며 보았던 꽃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제비꽃, 애기똥풀, 철쭉, 각시붓꽃, 매화말발도리, 팥배나무꽃…. 꽃향기에 스칠 때마다 그 향기는 타임머신처럼 나를 단숨에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어 행복한 추억의 순간으로 데려다준다. 어쩌면 내가 꽃에 천착하는 까닭도 눈에 보이는 꽃의 아름다움과 함께 꽃들이 슬며시 흩어놓는 그 향기가 행복했던 추억을 되살려주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꽃향기 숲 내음에 취해 천천히 걸어 도봉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쌍둥이 전망대에 올랐다. 흰 꽃을 가득 피운 팥배나무 너머로 우뚝 솟은 도봉의 바위 봉우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 사방으로 펼쳐진 신록이 흐린 눈을 씻어주고 몸에 와 감기는 바람도 연인의 손길처럼 부드럽고 따스하다. 전망대 철 난간에 이백의 <산중문답>이란 시를 스쳐 읽으며 이백을 흉내 내어 빙긋 미소를 지어본다. 삶과의 가장 멋진 연애는 가능한 한 다양하게 사는 것, 호기심을 간직하고 햇빛 비치는 산등성이로 올라가는 것이니 굳이 답할 이유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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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내려와 골목을 지나는데 모란 향기가 코끝을 스쳤을 때 거짓말처럼 영랑의 이 시가 생각났다. "숲 향기 숨길을 가로막았소/ 발길에 구슬이 깨이어지고/ 달 따라 들길을 돌아다니다/ 하룻밤 여름을 새워버렸소" –김영랑의 시 <숲향기> 전문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