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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북한산 만행기(萬行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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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북한산 만행기(萬行記)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가을을 만나러 북한산을 찾았다. 수도 서울을 품어 안으며 수려한 산자락을 펼치고 선 북한산은 자연이 그리울 때면 언제라도 찾아갈 수 있는 친근한 도심 속의 자연공원이다. 북한산을 오르는 길은 너른 품만큼이나 다양하다. 가을을 재촉하는 안개비가 내리는 아침,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터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들머리는 부드러운 숲길이 이어져서 산행이라기보다는 산책을 하는 듯 발걸음이 가볍다. 마주치는 꽃들과 인사하느라 발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어느새 꽃향기, 숲 내음에 스친 몸과 마음은 점점 산빛을 닮아간다.

보랏빛 벌개미취와 노란 각시원추리, 흰 사위질빵, 샛노란 마타리꽃, 붉나무꽃, 미역취, 자주꿩의다리, 자주조희풀, 물봉선 등 마주쳤던 꽃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보면 향기로운 꽃차를 머금은 것처럼 내 안이 향기로워지는 듯한 착각이 일기도 한다. 꽃에서 눈을 떼고 사방을 둘러보면 눈길 닿는 곳마다 경이로운 풍광이 펼쳐져 있어 말을 잊게 만든다. 비에 젖어 더욱 근엄해진 표정의 암봉들과 계곡을 따라 여울져 흐르는 맑은 물소리는 절로 소동파의 장광설(長廣舌)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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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聲便是長廣舌(계성편시장광설)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는 부처님의 법문이요

山色豈比淸淨身(산색기비청정신) 푸른 산빛은 청정한 부처 몸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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他日如何擧似人(타일여하거사인) 후일 어찌 사람들에게 전해 줄 수 있을까

행궁지를 지나 비교적 사람들의 발길이 한적한 남장대지 능선을 올랐다. 서서히 비가 그치고 구름에 가려져 있던 북한산의 주봉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북한산 주봉들과 의상능선이 시원하게 보이는 남장대지 능선은 산을 오르느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들었던 기억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하다. 흐린 날임에도 비에 씻긴 탓인지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올 만큼 조망이 좋다. 산정에 부는 바람은 제법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서늘하고 세차기까지 하다. 계절이 자리바꿈을 하는 요즘 같은 때엔 체온을 유지할 여분의 옷을 챙기는 것은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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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수동 암문을 거쳐 대남문에 닿았다. 1711년(숙종 37년)에 축성된 북한산성, 대남문은 그 14개 성문 중 가장 남쪽에 자리한 성문이다. 산 아래 펼쳐진 도심 풍경을 벗 삼아 산성길을 따라 걷다 보면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 현재와 과거가 혼재된 시간 속을 걷는 것 같은 착각이 일기도 한다. 대남문에서 하산을 시작하여 원점으로 회귀를 했다. 산은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 더욱 조심해야만 한다. 체력이 소진되어 다리가 풀려서 자칫하면 다치기 쉽기 때문이다. 하산길에 호젓한 산길 따라 심심치 않게 피어 있는 꽃들을 보다가 발을 헛디뎌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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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요정(心要靜) 신요동(身要動)이란 말이 있다. 굳이 풀이하자면 마음은 고요히, 몸은 분주하게 움직이라는 뜻이다. 돌이켜보면 일상 속의 나는 늘 마음만 분주하고 몸은 한가했던 것 같다. 행여 다칠세라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조심 걷는 동안 마음은 고요해졌고 내 몸은 분주했다. 산에 들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북한산은 참으로 매력적인 산이다. 마음이 복잡하거나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조바심이 난다면 가까운 산을 찾아 잠시라도 자연 속에 자신을 방생할 일이다. 산에 들어 땀 흘려 걷다 보면 근심은 사라지고 새로운 희망이 꽃처럼 피어날 테니.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