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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한가위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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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한가위를 보내며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한가윗날, 오랜만에 고향에서 차례를 지냈다. 그동안 코로나19로 인해 한자리에 모일 수 없었던 가족 친지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차례도 지내고 성묘도 했다. 딱히 명절이 아니라 해도 고향은 늘 아련한 그리움의 처소이지만 추석과 같은 명절에는 어머니 품처럼 더 그리움이 짙어지는 곳이다. 요즘 젊은 층에서는 그 그리움의 빛깔이 많이 바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마음의 풍향계가 고향을 향하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다. 고향은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삶의 흔적이 살아 숨 쉬는 곳이기 때문이다. 고향은 자신이 태어난 곳이자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안온한 마음의 영원한 안식처이다.

내게 고향은 어머니와 이음동의어이다. 고향을 생각하면 언제나 어머니가 제일 앞자리에 계셨다. 고향 집을 지키시던 어머니가 거처를 선산으로 옮기신 지 여러 해가 지났건만 아직도 고향을 떠올리면 어머니가 고향 집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곤 한다. 어머니가 지키시던 고향 집은 지금은 공직에서 정년퇴직한 형이 대신 지키고 있지만 고향을 떠올리면 형보다 어머니가 먼저 떠오르는 것만은 어찌할 수가 없다. 어머니가 계실 때와는 달리 조금씩 변해가는 고향 집의 모습이 때론 낯설기도 하지만 아직도 고향 집엔 어머니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어머니가 아끼시던 앵두나무와 감나무가 여전히 건재하고,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던 꽃밭엔 다양한 꽃들이 피어 옛 추억을 풀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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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에 올라 성묘를 마치고, 묏등에 기대어 앉아 내려다보는 고향의 들녘은 투명한 가을볕 아래 더없이 정겹고 평화롭다. 야트막한 산을 오르내리며 주고받는 대화 속엔 정겨운 추억이 묻어나고, 오가는 길섶의 코스모스. 쑥부쟁이, 며느리밑씻개, 물봉선, 돼지감자꽃, 왕고들빼기, 닭의장풀 같은 들꽃들은 저마다 가을 향기를 풀어놓는다. 어깨 위로 내려앉는 가을볕은 따사롭고, 살랑거리는 바람결은 부드럽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걷던 고향의 들녘을 걸었다. 걷다 보니 도회지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입었던 상처들이 절로 아무는 듯하다. 이래서 ‘더도 말고 덜지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생겨난 게 아닐까 싶다.

올해는 추석이 빠른 편이어서 아직 밤송이는 여물지 않았고 대추 알에도 아직 단맛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추석 같은 명절엔 고향을 찾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해진다. 도회지의 삶에 지칠 때 숲을 찾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처럼 고향은 우리를 포근히 안아주는 원초적인 공간인 까닭이다. 명절은 우리에게 잠시나마 삶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만나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으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다. 그래서일까. 오랜만에 만난 죽마고우들과 주고받는 실없는 농담에도 윤기가 흐르고. 눈길 닿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친구 못지않게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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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윗날 저녁엔 100년 만에 볼 수 있다는 완전히 둥근 보름달을 보았다. 구름이 끼어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는 보름달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달을 보며 마음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많은 사람이 나와 같이 달을 보며 저마다의 소원을 빌었으리라. 보름달은 해와 지구, 달이 일직선이 될 때 뜬다. 하지만 달이 지구 주변을 타원 궤도로 돌기 때문에 음력 보름과 실제 보름달이 되는 시간은 약간의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때문에 추석이나 정월대보름에도 꽉 찬 보름달이 뜨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00년 만에 나타난 가장 둥글고 커다란 보름달을 보면서 빌었던 사람들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그 중엔 나와 똑같은 소원을 빈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특별한 소원을 빈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소원을 빌었다 해도 그 소원은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아름다운 소원이었을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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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