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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상고대가 연출한 고향의 은빛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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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상고대가 연출한 고향의 은빛 아침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계묘년 새해가 밝은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해가 바뀌면 사람들은 저마다 묵은 달력을 떼어내고 새 달력을 걸며 선물처럼 받은 새해 삼백예순다섯 날을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 멋진 계획을 세운다. 새해만큼은 후회 없는 삶을 살아보리라 다짐하며 새 다이어리를 장만하여 새해 다짐을 꾹꾹 눌러 적어 넣기도 한다.

카네기는 “세상의 모든 업적 중 대부분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도전한 사람들이 이룬 것이다”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비록 그 소망들이 다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새로운 각오로 계획을 세우고 마음속에 소망을 품을 수 있게 하는 새해 벽두는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다.
문중 행사가 있던 일요일, 아침 일찍 고향 가는 버스를 탔다. 내가 사는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만 고향에 갈 때마다 나는 서정적인 감상에 젖곤 한다. 일찍이 김소월도 ‘고향’이라는 시에서 “짐승은 모를는지 고향인지라 / 사람은 못 잊는 것 고향입니다 / 생시에는 생각도 아니하던 것 / 잠들면 어느덧 고향입니다”라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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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수록 눈에 들어오는 풍경 하나하나가 사랑스럽고 정겹기 그지없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한눈에 들어오는 고향 산천이 온통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처음엔 며칠 전 내린 잔설인가 했는데 숲의 나무와 풀, 어느 것 하나 은빛으로 반짝이지 않는 게 없다. 그것은 눈이 아닌 상고대였다.

꽃이 없는 겨울은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분명 지루한 계절이지만 겨울에도 피는 꽃이 있으니 눈꽃과 상고대다. 눈꽃은 내린 눈이 나뭇가지나 풀섶, 바위, 돌 등에 내려앉은 것을 말하고, 상고대는 산악인들이 부르는 통칭으로 어원이 밝혀지지 않은 순수한 우리말이다. 기상용어로는 무빙(霧氷)이라고도 부른다. 대기 중의 물방울이 기온이 내려가면서 나무나 돌 등에 얼어붙은 얼음 입자이다. 급격히 지나치게 차가워진 미세한 물방울이 더 차가운 나무나 돌 같은 물체에 부딪히면서 만들어진다. 상고대는 추운 겨울, 눈이 내린 뒤 습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가 차가운 기온과 맞닿는 높은 산이나 강, 저수지 주변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겨울 진객이다. 특히나 나뭇가지에 피어난 상고대는 온 세상을 겨울 왕국의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하며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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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과 상고대의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일부러 겨울 산행을 떠난 적도 여러 번인데 생각지도 않았던 고향길에서 상고대의 은빛 풍경과 마주하다니 뜻밖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어 스마트폰을 꺼내어 시린 손 호호 불며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가로변의 남천 빨간 열매에도, 선 채로 말라버린 강아지풀에도, 버드나무에도 상고대는 피어 은빛 아침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 환상적이고 동화 속 세상 속에 내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살아가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과 만날 수 있는 순간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니 큰 축복을 받은 느낌이다.

상고대는 통산 해발 1000m 이상의 높은 산에서 관찰되는데 이 정도 높이가 되어야 낮에는 따뜻하더라도 밤이 되면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고대의 진경을 만나려면 높은 산을 오르는 수고를 하거나 댐이 있는 호숫가를 찾아야 하는데 산도, 호숫가도 아닌 고향에서 이토록 멋진 아침을 보다니 올해는 왠지 좋은 일이 많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상고대는 눈부시도록 아름답지만 아름다운 것들의 숙명처럼 해가 뜨고 기온이 올라가면 곧 사라진다. 기상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머지않아 상고대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만나기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 한다. 기후 변화로 기온이 올라가는 만큼 상고대가 발생할 확률도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으니 부인하고 싶지만 당연한 귀결이다. 지구 환경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