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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바람의 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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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바람의 기별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나태주의 ‘멀리서 빈다’ 전문

가을이 깊어지는가 싶으면 습관처럼 나는 이 시를 읊조린다. 그중에도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당부하는 마지막 연은 절창이다. 매번 화살촉처럼 날카롭게 가슴에 와 꽂히며 부르르 떠는 화살의 진동이 고스란히 온몸으로 전율을 일으킨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서늘해진 기온 탓일까. 바람에 떨어진 낙엽처럼 불쑥 날아든 지인의 부음 앞에 맥이 풀린다. 그러고는 가만 내 나이를 헤아려 본다. 그동안 안부 없이 지낸 무심한 세월이 미안하기도 하고,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목숨 지닌 자의 숙명인 죽음 앞에 새삼 작아지는 나를 깨닫곤 한다. 어느덧 육십갑자를 한 바퀴 휘휘 돌아 나왔으니 언제 떠나도 괜찮다고 허튼소리 세상에 건네며 살아왔으나 늘 죽음은 나와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 여겼기에 크게 관심을 두지도, 깊은 생각조차 해본 적 없기에 갑작스러운 지인의 부음은 그저 황망하고 당혹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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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부모님의 건강 체질을 물려받은 덕분에 상시 복용하는 약 하나 없는 나는 산을 오르내리며 내 건강 상태를 가늠하곤 한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지척에 산을 두고 사는 덕분에 배낭만 메고 나서면 어느새 발길은 산길로 접어든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매일 눈인사를 건네는 도봉이 오늘따라 쨍한 쪽빛 하늘을 배경으로 흰 이마가 도드라져 보여 여간 매혹적이지 않다. 서둘러 배낭을 꾸려 산을 향한다. 아직 단풍 든 잎만 보이지 않을 뿐 숲엔 이미 가을빛이 완연하다. 분홍빛 팥배나무 열매와 등산로에 흩어진 도토리, 쑥부쟁이와 붉은 여뀌 꽃 무리, 저마다 가을을 속삭이고 있다. 은빛 햇빛을 싣고 산을 내려가는 물소리도 한결 은근해졌다.

혹시라도 설악산 단풍이 밤마실이라도 다녀갔으려나 싶어 나무 사이를 찬찬히 돌아보아도 아직 단풍 든 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여름내 초록 일색이던 나뭇가지에 간간이 보석처럼 빛나는 열매들을 자랑처럼 내단 나무들이 눈에 띈다. 여름날 꽃 피는 줄도 모르고 지나쳤던 나무들이다. 설령 꽃을 보았다 해도 작고 보잘것없어 큰 관심을 보인 적 없는 나무들이 하나같이 빛나는 열매들을 매달고 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가을을 두고 열매가 아름다운 계절이라고 했던 것일까. 그중에도 참회나무 열매는 매혹적이다. 얼마 전 산행길에 얼핏 보고 참빗살나무 열매인 줄 알았던 바로 그 열매다. 터진 붉은 주머니 속에 황금색 보석이 터져 나온 듯한 참회나무 열매. 그러고 보니 도봉산엔 참회나무가 의외로 많다. 봄에는 피는 꽃을 보고 나무를 식별한다면, 가을엔 열매를 보고 나무들의 이름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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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를수록 길은 점점 가팔라지고 뺨을 스치는 바람결도 한결 서늘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위로 우뚝 솟은 자운봉의 자태가 오늘따라 눈부시게 다가온다. 문득 산을 오르는 일이 늘 그리워하던 연인의 품에 안기는 행위와 닮았단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 바라볼 땐 그저 아련한 그리움뿐이더니 이렇게 산의 품에 들면 편안하고도 가슴 먹먹해지는 뿌듯함이 느껴진다! 허위허위 신선대를 오르다가 보랏빛 산부추꽃을 보았다. 어쩌자고 이 가파르고 높디높은 암봉 위에 꽃을 피웠을까. 일견 안쓰럽고 대견하다. 산을 좋아한다면서도 그저 어쩌다 한 번 잠깐 다녀가는 나와 달리 혼신의 힘으로 어여쁜 꽃을 피워 올린 산부추의 정성이 산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어디 산부추뿐이랴. 숲속의 수천수만 초록 생명들은 하나같이 바람의 전언에 귀 기울이며 자연의 순리를 따른다. 곧 단풍 들고 낙엽이 질 것이다. 부디 아프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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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