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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일대일로 (一帶一路) … 시진핑 vs 한무제 장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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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일대일로 (一帶一路) … 시진핑 vs 한무제 장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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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일대일로 (一帶一路) 10년 시진핑의 꿈

중국 하면 조공(朝貢)부터 연상하는 사람이 많다. 조공이란 속국이나 제후가 종주국에 받치는 공물을 말한다. 중원을 지배했던 중국 역대의 왕조가 주변의 약소국가들과 행한 대외 정책의 한 방식이었다. 중국은 우리 선조들은 삼국시대부터 중국의 역대 왕조에 조공을 해왔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조공 관계를 들어 한국이 오랫동안 사실상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주장한다.
알고 보면 이 조공은 중국이 바치기 시작했다. 기원 전 2세기 경 중국 북쪽에 흉노라는 나라가 있었다. 흉노를 이끌던 묵돌은 천산산맥과 감숙 지방에 자리잡은 월지국(月氏國)을 중앙 아시아 지역으로 몰아내면서 역대 최대의 유목민족국가를 수립하였다. 기원전 200년에 흉노는 마읍성(馬邑城)을 쳐서 그곳을 지키고 있던 한왕 신의 항복을 받아내고 태원으로 진격, 진양으로 나아갔다. 여기서 당시 중국을 통일하고 한나라를 새로 연 한고조 유방과 한판 승부를 벌였다. 유방은 흉노를 정벌하여 북방의 안정을 도모하겠다고 벼렸으나 흉노의 계략에 말려 거꾸로 포위당했다. 백등산(白登山)에서 7일간 포위된 유방은 흉노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고 풀려난다. 이때 한 고조 유방이 흉노에게 한 화친조약이 바로 흉노에 조공을 바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중국이 바로 조공의 원조인 셈이다.

흉노와 한이 맺은 화친 조약은 크게 4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 둘째, 한이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공물을 바친다. 셋째,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는다. 그리고 넷째,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조공합의는 기원전 198년 중국 한나라 공주가 흉노에 도착함으로써 발효되었다. 두나라 조정에 왕위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해 나갔다. 조공이 계속 이어졌다는 뜻이다. 중국이 흉노에 내는 조공 액수도 매년 늘어났다. 기원전 192년부터 135년까지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기록이 전하다. 이 시기 한나라는 흉노의 속국과 같은 존재였던 셈이다. 중국이 역사유물로 자랑하는 만리장성도 흉노의 위협을 막기위한 고육지책이었다.

한나라 7대 황제 무제에 이르러 중국은 흉노를 퇴치할 한 가지 꾀를 낸다. 흉노의 적인 월지라는 나라를 찾아 동맹을 맺어 함께 흉노를 치겠다는 구상을 한다. 월지는 원래 중국 북방에 있던 국가로 흉노와는 한 뿌리였다. 도중에 흉노와 월지 사이에 패권전쟁이 벌어졌고 그 싸움에 패한 월지는 끝내 서역으로 쫓겨났다. 그 전쟁에서 월지 왕이 살해됐다. 흉노가 월지 왕의 시신에세 잘라낸 두개골을 술잔으로 삼았다. 월지가 흉노에 대해 깊은 원한과 복수심을 품게 되었으리라 판단한 한 무제는 월지와 연합하여 흉노를 제압하겠다는 계략을 세운 것이다. 적의 적을 친구를 만들어 바로 옆의 적을 잡겠다는 이른바 "이이제이" 전략이었다.,

월지는 중국에서 아주 먼 서쪽에 있었다. 중국과는 한번도 거래를 해 본 적이 없는 미지의 세계였다. 한무제는 미지의 국가인 월지를 찾아가 군사동맹을 맺을 인물로 장수 장건을 뽑았다. 장건은 한중(漢中) 출신의 낭관이었다. 장건이 월지국으로 출발한 시기는 기원전 139년경으로 추정된다. 장건은 월지와 동맹을 맺고 흉노를 협공하는 약속을 성립시키는 임무를 지니고 흉노 출신 감부(甘父)를 길잡이 삼아 100여 명을 이끌고 장안을 출발했다.

월지가 어디에 있는지 그 정확한 위치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흉노의 영역을 지나야 하는 위험천만한 여정이었다. 장건 일행은 월지에 가보지도 못하고 하서(河西) 지역에서 흉노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장건 일행은 흉노에 10년이나 잡혀있었다. 억류 생활 10여 년 동안 장건은 흉노 여인을 처로 얻어 아들까지 낳았다.

기회를 노리다가 탈출에 성공한 장건은 서쪽으로 수십 일을 여행한 끝에 소그디아나 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 월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건은 무제의 뜻을 전하며 월지 왕을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월지는 이미 비옥한 땅에서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월지로서는 굳이 한나라와 동맹하여 흉노를 공격할 까닭이 없었다. 1년 남짓 머무른 장건은 월지를 떠나 귀로에 올랐지만 다시 흉노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1년 정도 억류되어 있던 장건은 흉노에 왕위를 둘러 싼 내분이 일어난 틈을 타 흉노인 아내와 시종 한 명을 데리고 탈출했다. 천신난고 끝에 기원전 126년경 장안으로 돌아왔다. 장안을 출발한 지 약 13년 만의 귀국이었다.
장건은 월지를 끌어내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쪽 지역에 관한 많은 정보를 보고했다. 이 정보는 한나라가 대외 정책을 세우는 데 큰 보탬이 됐다. 한 무제는 그 공로를 인정해 장건을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임명했다. 중국의 사서 사기와 한서에 나오는 서역에 관한 기록의 대부분은 장건의 정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오늘날 비단길로 부르는 실크로드는 바로 장건이 개척한 것이다.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무역을 함으로써 중국은 경제적으로 강대국이 됐다. 장건은 비록 월지와의 군사 동맹을 구축하지는 못했지만 그때 개척한 비단길 교역으로 통해 중국을 당대 세계최강의 강대국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물론 장건 이전에도 서역 여러 나라들은 교류하고 있었고 교통로도 있었다. 장건의 비단길은 중국 제국 차원에서 공식적인 교역과 교류가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이후 동아시아 세계와 중앙아시아 세계 나아가 더 먼 서쪽과 상업적, 문화적, 정치적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업적을 평가받고 있다. 공식적인 교역의 물꼬가 트이자 서역에서 중국으로 보석, 산호, 공예품, 향료, 석류, 포도, 목재 등이 들어왔고 중국의 견직물을 비롯한 많은 산물들이 서역으로 들어갔다. 무한 제는 대완 지역에 피와 같은 땀을 흘리며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명마, 곧 한혈마(汗血馬)가 있다는 장건의 정보를 바탕으로 기원전 104년 장군 이광리를 보내 그 한혈마를 입수하기도 했다.

장건의 비단길을 현대에 승화발전시키 것이 바로 시진핑의 일대일로이다. 일대일로란 중국 주도의 말 그대로 ‘신(新) 실크로드 전략 구상’이다. 내륙과 해상의 실크로드경제벨트를 지칭한다. 2014년부터 2049년 까지 고대 동서양의 교통로인 현대판 실크로드를 다시 구축해, 중국과 주변국가의 경제․무역 합작 확대의 길을 연다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2013년 시진핑 주석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지금은 140여개 국가 및 국제기구가 참여하고 있다. 일대일로는 내륙 3개, 해상 2개 등 총 5개의 노선으로 추진되고 있다. 일대일로 프로젝트가 성공할 경우,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 탄생한다. 인구 50억명 과 GDP 규모 21조 달러를 차지하는, 성장 잠재력이 가장 큰 경제 회랑이 되는 것이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경제학 박사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