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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칼럼] 팀장님의 목장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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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칼럼] 팀장님의 목장갑

김아름 플랜비디자인 수석컨설턴트이미지 확대보기
김아름 플랜비디자인 수석컨설턴트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며 잠시 대학교 도서관 계약직 일을 할 때였다. 도서관의 업무는 루틴(routine)을 중심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주어진 일과만 마치면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어도 될 정도로 여유로웠다. 입사 면접 때 처음 뵈었던, 도서관에서 20년을 넘게 계셨던 팀장님도 그 도서관의 일과 닮으셨었다. 항상 여유로워 보였고 농담을 잘하셨으며 유유자적 이 부서, 저 부서를 마실 다니셨다. 직원들에게 화를 내거나 일을 채근하고 닦달한 적도 없어 딱히 누구도 그분을 불편하게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도서관에는 단 한 가지, 오래된 과제가 있었다. 누군가가 소장하던 장서 1만 권 이상을 학교에 기증했는데 아무도 그 장서들을 처리하지 않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의 흔적에 긁히며 알 수 없는 문자들을 가득 담은 장서들은 곰팡내 나는 지하 보존 서고에 무심하게 쌓여 제자리를 찾아갈 날만 기다렸다. 간간이 사서들이 책 한 권 한 권에 등록번호를 부여하는 일, 라벨링을 하는 장비 작업만 천천히 진행될 뿐이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새로운 팀장님이 부임해 오셨다. 선한 인상을 가졌지만 어딘가 날카롭고, 워낙 꼼꼼하고 활동적이어서 깡마를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체구를 가진 분이었다. 필자는 당시 출근 러시를 피하기 위해 새벽반 수영을 갔다가 이른 시간에 출근하곤 했는데 매번 먼저 나와있는 건 그분이었다. 일찍 출근하고 싶어 나온 건 아니었지만 팀장님은 부지런한 2등을 매우 흡족해했다. 하지만 당신이 일찍 나온다고 하여 팀원들에게 조기 출근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출근하는 구성원들의 인사를 반갑게 받으며 묵묵히 조간신문을 모두 훑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팀장님이 목장갑을 꼈다. 1만 권의 장서를 정리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역할 분담을 어떻게 할 건지 논의를 하고 지하로 다 같이 내려갔다. 필수 인력을 제외한 대부분은 며칠 내내 반나절을 지하에서 책을 정리하며 보냈다. 짜증이 나고 피곤할 법한 일이었다. 미루고 미루면 우리 다음의 누군가, 팀장님 다음의 누군가가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팀장님은 장서를 정리하며 단 한 번도 감정과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함께했다. 구성원들에게 맡기고 정리하는 일에서 빠지지도 않았다. 팀장님은 매일같이 목장갑을 끼고 먼지 쌓이고 냄새나는 장서들을 번호에 맞게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10년도 훌쩍 넘은 지금도 그 장면은 필름처럼 인이 박혀 있다. 그렇게 보름 정도를 보냈을까, 누군가가 오랜 시간 소중히 모은 장서들은 도서관 깊숙한 보존 서고에 나란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앞장서 모범을 보인다는 ‘솔선수범’은 오랜 시간 리더의 덕목으로 여겨져 왔다. 구성원의 일을 지나치지 않고 관심과 공감으로 함께하여 그들이 신뢰를 가지고 따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개코원숭이는 1분에 한 번 이상 그 무리의 리더 격인 원숭이의 표정을 쳐다본다. 리더의 표정과 행동을 살피면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리더의 행동과 대응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계속 이어져 왔다.

하지만 지금처럼 변화가 빠르고 선제적 대응을 해야 하는 시대에는 꼼꼼하고 책임감 있는 솔선수범형 리더십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더구나 솔선수범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요즘 세대들에게는 고식적이고 유물처럼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단어를 다시 꺼내든 이유는 솔선수범이라는 행위의 목적이 구성원을 따르게 하는 것이라기보다 그에 선행되는 더 중요한 함의가 있기 때문이다. 솔선수범은 리더가 구성원을 움직일 어떤 의도나 목적을 갖지 않아도 마땅히 그의 책임과 의무를 다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영향력이 흘러가는 일이다.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모범을 보이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다. 유일한 방법이다”라고 했다.

필자가 만난 그 팀장님은 구성원들이 서로 미루기에 바빴던 일에 손을 걷어붙였다. 물론 구성원들이 모르는 척하지 못하고 따라나서리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마른 기침이 나고 허리가 아픈 이 일을 구성원들만 하도록 전부 위임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먼저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팀장님은 몰랐을 것이다. 그때 그 행동이 잠시 계약직으로 일하던 어느 구성원에게 두고두고 남을 영향력을 주었다는 것을.

이후 취업이 되어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이직을 했다. 어설픔 때문에 좌충우돌하고 영혼이 도망갈 정도로 호되게 일을 하며 그렇게 초년생 시기를 보냈다. 이후 여러 직장을 거쳐 이제는 어떤 새로운 구성원을 맞이해도 웬만해선 그들보다 나이가 많은 연차가 되었다. 처음 겪는 일보다 겪어본 일들이 더 많아서 일의 무게나 책임도 늘었고 챙길 것들도 많아졌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누군가의 리더가 아니어도 내 삶의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이 책임에서 도망칠 수 없다.

누군가에게 미룰 수 있다면, 도망갈 수 있다면, 모르는 척할 수 있다면 어떨까 생각하는 나날도 가끔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주 오래전 목장갑을 끼고 먼지 나는 지하에서 허리를 굽히고 있었던 팀장님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오늘 내가 어떤 일에 대해 책임을 내려놓지 않고 직면하는 모습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모습을 누군가는 지켜보고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 누군가는 나의 동료, 가족, 나의 아이, 다음 세대일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김아름 플랜비디자인 수석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