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으로 본다면 (규제는) 다 필요해서 생긴 경우가 많습니다." 'K-핵심산업 규제 전봇대를 뽑아라' 타이틀의 기획 취재를 위해 만난 양준석 한국규제학회 회장의 지적이다. 취재를 마치고 나서도 양 회장의 말이 귀에 맴돈다. 국내 기업뿐만 아니라 해외 기업들이 국내에 진출하는 걸림돌로 작용하는 여러 규제들이 정치적인 목적에서 비롯된다는 말로 들린다. 반대로 해석하면 규제 개혁은 정치권이 먼저 나서야 한다는 얘기다.
다음 달 10일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이 반도체 규제 개선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여야 할 것 없다. 선거를 앞두고 표심을 의식한 행보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정치권이 나 몰라라 하는 사이, 글로벌 기업들은 최적의 조건을 제시하는 국가에 잇따라 진출하고 있다. 반도체·인공지능(AI) 등 첨단 산업 기지들이 우리의 경쟁 상대인 대만·일본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대만의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 TSMC는 일본에 새로운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결정하고 일본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 덕에 20개월 만에 공장을 완공했다. 미국은 국내 기업인 삼성전자를 비롯해 SK하이닉스, TSMC까지 대표 반도체 기업들 유치에 성공했다.
아쉽지만 한국은 이렇다 할 기업의 투자 소식이 없다. 메모리 반도체 1, 2위 기업을 보유하고 있는 위상에 걸맞지 않다. 상황은 처참하다. 제임스 김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 회장이 최근 내놓은 보고서에서 한국의 심각한 규제를 지적한 점이 이를 방증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싱가포르에 아·태 본부를 둔 기업은 5000개에 달하지만 한국은 100개도 안 된다.
아직 기회는 남았다. 늦었지만 반전의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암참은 보고서에서 “아시아 허브 역할인 싱가포르를 떠나려는 글로벌 기업이 많다는 건 한국에 더할 나위 없는 기회”라며 “기업 유치를 위해서는 인센티브의 필요성이 있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한국이 아시아 허브로 도약하는 데는 규제 개혁이 최우선 과제다. 지금이라도 정치권과 정부, 학계, 민간 기업들이 모두 머리를 맞대고 본격적인 규제 개혁과 지원책을 마련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