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로의 눈은 사람들의 발길에 다져져 그리 미끄럽지 않다. 등산로를 벗어나면 아직도 눈이 그대로 쌓여 있어 설경을 즐기기엔 부족함이 없다. 산길은 오르막이긴 해도 경사가 비교적 완만해 오랜만의 산행임에도 그리 힘들지는 않다. 북한산의 대표 암봉인 용암봉, 만경대, 백운대, 인수봉이 나란히 있는 모습을 거의 눈높이에서 볼 수 있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암봉 밑으로 펼쳐지는 산자락엔 흰 눈이 덮여 있다. 능선 왼쪽 산 아래로는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서울이 보인다. 한쪽은 자연의 숲을, 다른 한쪽은 사람들이 복닥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숲을 보며 걷는 길이 진달래 능선이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 밟히는 소리가 정겨워 혼자 걷는 외로움을 잊게 해준다. 나는 홀로 산행을 즐기는 편이다. 혼자 산을 오르면서 생각도 정리하고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체력에 맞게 산행 속도를 조절하면서 여유롭게 산을 오를 수 있다. 타인의 속도에 맞추느라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체력을 과다하게 소모할 까닭도 없으니 무리할 일이 없어 좋다. 북한산의 풍광도 즐기며 걷다 보니 어느새 대동문에 이르렀다. 대동문은 북한산성의 동쪽에 있는 성문으로 숙종 37년(1711년)에 지어졌다. 서울의 동쪽과 북쪽을 잇는 관문으로 수유동과 우이동을 연결하는 군사 목적으로 설치된 관문이다.
대동문을 지나자 등산객들이 부쩍 눈에 띈다. 백운대 쪽에서 하산하는 사람들과 북한산성 입구에서 올라온 등산객이 합쳐지기 때문이다. 어느새 해는 중천에 떠올라 햇살 바른길에는 얼었던 눈이 녹아 질척거리기 시작한다. 눈길이 가장 미끄러울 때는 이렇게 눈이 녹기 시작할 때다. 내딛는 발걸음에 더욱 신경을 쓰며 조심조심 산을 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퉁이를 돌아설 때마다 눈앞에 펼쳐지는 북한산의 풍광은 절로 탄성을 자아낼 만큼 아름답다. 이렇게 멋진 산이 대도시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용암문을 지나고 노적봉과 만경대 사이를 지나 봉암문에 도착했다.
봉암문에서 백운대 오르는 등산로는 많은 사람으로 붐빈다. 다양한 등산 코스를 타고 올라온 등산객이 합쳐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북한산은 갈림길이 많고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코스의 등산을 즐길 수 있다. 자신의 체력에 맞게 코스를 정하고 이정표를 따라 움직이면 자기만의 북한산을 즐길 수 있다. 진달래 피는 봄이나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이 아니더라도 북한산은 늘 제자리를 지키며 우리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준다.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멋진 산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백운대에 올라 인증샷을 찍고 내려오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바위 위에서 햇볕을 쬐며 졸고 있다. 가까이 다가서는 인기척에도 불구하고 무심한 듯 가늘게 눈을 한 번 떴다가는 이내 다시 눈을 감는다. 느긋하게 오수를 즐기는 고양이의 여유가 부러웠다. 얼마나 더 산을 올라야 저리 여유로울 수 있을까.

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