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장마라고 해서 날마다 비가 쉬지 않고 내리지는 않는다. 때로는 집중호우로 물난리가 나기도 하지만 햇빛 쨍한 날도 있게 마련이다. 마음만 먹으면 비가 내리지 않는 틈을 타서 꽃을 보거나 숲을 찾아 자연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하늘이 흐려지면 마음도 덩달아 흐려지고, 비가 내리면 마음에도 습한 기운이 배어서 무기력해지고, 하던 일도 손에 잘 잡히지 않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장마도 얼마만큼 시간이 지나면 끝이 난다는 사실이다. 젖을 만큼 젖고 나면 햇빛 반짝이는 날이 따라오는 게 자연의 순리다.
마트에 다녀오다가 길가에 활짝 핀 왕원추리꽃을 보았다. 원추리는 예로부터 망우초(忘憂草)라 해서 근심을 잊게 해주는 꽃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 추적추적 장맛비 내리는 날, 대청마루에 앉아 담장 밑에 핀 원추리꽃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외에도 손톱에 물들이던 봉숭아꽃, 보라색 비비추, 능소화, 수국 같은 꽃들도 궂은 장마철에 우리의 흐린 마음을 환하게 해준다. 아름다운 꽃을 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나는 비 오는 날 조용히 비를 맞고 서 있는 나무들을 바라보는 것도 좋아한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와도 늘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비바람을 견디고 서 있는 나무들을 보면 때로는 성자와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독일의 위대한 작가 헤르만 헤세는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에서 나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무는 늘 나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는 설교자이다. 나는 나무를 존경한다. 나는 많은 사람 사이에서, 가정집 안에서, 크고 작은 숲속에서 자라는 나무를 존경한다. 특히 한 그루씩 홀로 서서 자라는 나무를 존경한다. 나무는 마치 고독한 존재와 같다. 나약함 때문에 현실을 벗어나 은둔하려는 사람과는 다르다. 마치 베토벤이나 니체처럼 고독하게 버텨낸 위대한 사람 같다.” 그런가 하면 시인 도종환은 ‘나무’라는 시에서 “퍼붓는 빗발을 끝까지 다 맞고 난 나무들은 아름답다/ 밤새 제 눈물로 제 몸을 씻고/ 해 뜨는 쪽으로 조용히 고개를 드는 사람처럼 슬픔 속에 고요하다”라고 쓰기도 했다.
창가에 서서 조용히 비를 맞고 서 있는 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묵상하는 성자와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무는 한 번도 제자리를 떠나지 않고도 사람보다 훨씬 크고 오래 산다. 늘 같은 자리에서 제게 오는 시련을 마다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낸다. 나무는 비바람·눈보라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제게 오는 고통마저 아름다운 무늬로 만들어 제 몸에 간직한다. 무엇보다 나무는 자신의 존재를 탓하거나 부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무엇이 되려고 욕심부리지 않는다. 어느 곳에 뿌리를 내리든 그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수시로 내리는 빗줄기에 몸도 마음도 젖어 우울해지기 쉬운 장마철, 나무처럼 단단하고 꿋꿋하게 견디며 햇빛 부신 날을 기다려야겠다.

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