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류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멋스럽고 풍치 있게 노는 일' 또는 '속된 것을 버리고 고상한 유희를 하는 것'이라고 풀이돼 있다. 바람 ‘풍(風)’자와 물 흐를 ‘유(流)’자가 합쳐진 풍류라는 말에 담긴 의미는 단순한 바람과 물의 흐름만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까지 고려해 파악해야 하는 자연이기 때문에 그 함의는 매우 복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풍류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자연과 인생과 예술이 삼위일체가 되어야 한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멋을 아는 벗들과 시와 음악으로 교감하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즐길 줄 알아야 진정한 풍류도(風流道)라 할 수 있다. 내 식대로 풍류를 정의한다면 한마디로 '잘 노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광릉국립수목원을 지나 봉선사에 이르는 수목원 숲길은 초록 그늘이 드리워져 한여름 드라이브를 즐기기에 최적의 장소다. 30㎞의 제한 속도를 지켜 느긋하게 차를 몰며 스치는 숲의 풍경들이 더위를 잊게 해준다. 여름 향기 가득한 길을 지나서 봉선사 주차장에 들어서니 맑고 그윽한 연꽃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연꽃 방죽을 따라 청사초롱이 즐비하게 걸리고 연꽃 축제를 알리는 현수막도 보인다. 아직은 연꽃 축제가 열리기 전인데 꽃구경 인파인 듯 제법 많은 사람이 오간다. 너른 연잎 사이로 꽃대를 밀어 올린 어여쁜 연꽃들이 저마다 자태를 뽐내며 바람을 타고 있다. 이제 막 부풀어 오른 꽃봉오리가 있는가 하면, 만개해 꽃잎을 활짝 펼친 연도 있고 이미 져서 두어 닢의 꽃잎만 겨우 달고 연밥을 내보인 꽃도 보인다. 너른 연꽃 방죽에 홍련·백련뿐만 아니라 수련과 노랑어리연, 부들까지 저마다 자태를 뽐내고 있다.
소나기라도 한 차례 쏟아지면 연잎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와 물방울을 달고 있는 청초한 연꽃의 자태를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은 마음속의 바람일 뿐, 하늘은 구름 한 점 보이지 않고 뜨거운 햇살은 연지를 도는 발걸음을 나무 그늘 쪽으로 재촉한다. 뜨거운 햇살에 쫓겨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처럼' 잰걸음으로 연지를 돌아 나무 그늘에 앉아 바람에 실려 오는 연꽃 향기를 흠향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진흙 뻘밭에 뿌리를 내리고도 깨끗함을 잃지 않는 연꽃처럼 연지를 거니는 동안 나의 영혼도 조금은 맑아졌을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도 있지만 나는 연꽃을 볼 때면 사람도 꽃만큼만 아름다웠으면 좋겠단 생각을 한다. 입으로는 꿀처럼 달콤한 말을 하면서도 흉중엔 칼을 품고 사는 구밀복검(口蜜腹劍)의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이 아니던가. 제게 허락된 허공만큼만 향기로 채우는 꽃들처럼 욕심부리는 일도 없이 풍류를 즐기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그보다 멋진 일이 있겠는가 싶기 때문이다.
어여쁜 연꽃과 함께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연꽃 향기가 내 몸에도 스민 것일까, 집에 돌아와도 그 맑고 그윽한 향이 지워지지 않는다. “연꽃의 지혜대로 맑고 향기롭게 살다 갑시다”라고 했던 법정 스님의 말씀이 문득 떠오른다. 불볕더위에 심신이 지쳐 있다면 에어컨 바람만 쐬기보다는 가까운 연지를 찾아 어여쁜 연꽃을 보며 꽃의 지혜를 배워보는 것도 괜찮은 여름나기가 아닐까 싶다.

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