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사색의향기] 배롱나무꽃을 보며

글로벌이코노믹

[사색의향기] 배롱나무꽃을 보며

배롱나무꽃을 보며, 백승훈 시인이미지 확대보기
배롱나무꽃을 보며, 백승훈 시인
며칠 전 새벽 산책을 하다가 배롱나무꽃이 핀 것을 처음 보았다. 초등학교 담장 아래 자잘한 붉은 꽃잎들이 떨어져 있었다. 고개를 젖히니 담장을 넘어온 배롱나무 가지들이 붉은 꽃숭어리들을 가득 달고 있었다. 폭우와 폭염을 견디고 8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찬란한 꽃을 피워 단 배롱나무가 문득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산책 시간을 새벽으로 바꾼 이유는 찜통더위 때문이었다. 해가 뜨면 볕이 너무 뜨거워 산책을 한다는 건 무모한 일이었다. 나무 그늘조차도 후끈한 열기로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힘들다. 그런데도 배롱나무는 어김없이 꽃을 피워 달고 여름의 한 귀퉁이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던 게다. 배롱나무꽃을 보고 있자니 무작정 태양을 원망하며 이 폭염의 계절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던 나의 이기심이 부끄러워졌다.

내가 산책을 즐기는 것은 건강을 유지하고 싶은 이유도 있지만, 산책이 마음의 평안에 이르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산책을 통해 풍경 속을 걷다 보면 평소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비록 시선은 밖의 풍경을 향해 있어도 곧 그 시선이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자연이란 우리를 되비추는 거울과 같기 때문이다. 산책이야말로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한 소중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단 하나, 새벽 산책의 아쉬운 점은 내가 좋아하는 꽃을 볼 기회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어슴푸레한 어둠을 밟아 걷다 보면 꽃을 지나치기 쉽기 때문이다.

배롱나무꽃을 보며, 백승훈 시인이미지 확대보기
배롱나무꽃을 보며, 백승훈 시인
배롱나무꽃을 보며, 백승훈 시인이미지 확대보기
배롱나무꽃을 보며, 백승훈 시인
배롱나무꽃을 보며, 백승훈 시인이미지 확대보기
배롱나무꽃을 보며, 백승훈 시인
배롱나무꽃을 보며, 백승훈 시인이미지 확대보기
배롱나무꽃을 보며, 백승훈 시인
배롱나무꽃을 보며, 백승훈 시인이미지 확대보기
배롱나무꽃을 보며, 백승훈 시인

그렇다고 낙담할 이유는 없다. 굳이 ‘시절 인연’이란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고, 봐야 할 꽃은 결국 보게 마련이다. 그 새벽에 바닥에 떨어져 있던 붉은 꽃잎들이 나의 시선을 배롱나무 가지 끝으로 이끌었던 것처럼. 가장 뜨거울 때 가장 화사하게 피어나는 배롱나무는 ‘목백일홍’이란 이명(異名)으로도 불린다. 열흘 붉은 꽃도 없다는 말이 무색하게 배롱나무는 석 달 열흘을 두고 피기 때문이다. 그토록 오래 꽃을 피울 수 있는 비밀은 한 번 피어 백일 붉은 것이 아니라 자잘한 꽃들이 릴레이하듯 끊임없이 피고 지기 때문이다. 그토록 치열하게 꽃을 피우며 석 달 열흘을 꽃나무로 사는 배롱나무를 볼 때면 쉬 지치고 절망하고 포기하기를 습관처럼 되풀이하던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꽃들은 내일 질 것을 두려워하며 오늘 꽃 피우기를 망설이는 법이 없다. ‘오늘은 나의 몫, 내일은 신의 몫’이라 했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꽃들은 태양이 뜨거워도, 폭풍우가 몰아쳐도 자신의 때가 되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세상을 향해 찬란하게 피어난다.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내가 오랫동안 꽃에 매료된 데에도 그런 것들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생각한다. 꽃만 보면 카메라를 들이대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맨날 보는 꽃인데 뭐가 그리 좋으냐고 묻는다. 꽤 오랜 시간을 꽃에 관한 글을 써왔으니 그리 묻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세상엔 아직도 내가 아는 꽃보다 모르는 꽃이 더 많고, 익숙한 꽃도 볼 때마다 새롭고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관심 또는 흥미를 뜻하는 영어 ‘interest’의 어원은 ‘다르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interesse’라고 한다. 낯설고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끼는 게 인간이지만 새로움은 꼭 처음 접하는 것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꽃이라도 보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르고, 이전과 미묘한 차이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많은 꽃이 피어나고 또 질 것이다. 찬란한 꽃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철 따라 피는 꽃을 다 볼 수는 없지만 되도록 꽃을 보는 시간을 늘려 가려고 노력한다. 마음의 평안을 얻고 나 자신을 돌아보는 데에 꽃보다 좋은 거울은 없기 때문이다.

백승훈 시인이미지 확대보기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