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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에너지 톺아보기] 수소경제 활성화를 위한 제언…보이지 않는 인프라, 리스크 관리가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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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에너지 톺아보기] 수소경제 활성화를 위한 제언…보이지 않는 인프라, 리스크 관리가 빠져 있다

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
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이미지 확대보기
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

수소경제가 본격화되는 시대에 한국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리스크를 흡수할 제도적 인프라의 부재이다. 지금 한국의 수소·암모니아 프로젝트는 금융조달, 인증, 시장 진입 단계에서 반복적으로 좌초되고 있는데, 그 공통된 원인은 보험·보증·위험분담 장치가 제도화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앞으로 20~30년 동안 국제 규범(LCA·RFNBO·CBAM), 탄소 기준, 에너지 가격, 기술 효율이 어떤 궤적을 그릴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이 불확실성을 흡수하는 장치가 바로 보험과 보증이다. 해외에서는 이 장치가 ‘보이지 않는 에너지 인프라’로 기능하며, 산업의 속도를 유지하는 핵심 기반이 된다.

일본의 JOGMEC은 수소·암모니아·CCS 프로젝트 전반에 대해 지분 투자와 채무 보증을 제공하며, 이른바 ‘리스크 머니(risk money)’ 공급자로 기능하고 있다. 미국 에너지부 산하의 Loan Programs Office(LPO) 역시 혁신적인 청정에너지와 수소 프로젝트를 대상으로, 프로젝트 비용의 최대 80%까지 정부 보증 대출을 제공하는 체계를 운영 중이다.

EU는 ‘EU Hydrogen Bank’를 통해 재생수소 생산 프로젝트에 대해 kg당 고정 프리미엄을 지급함으로써, 생산단가와 시장가격 간의 격차를 보전하는 방식으로 수익 리스크를 완화하고 있다. 해외 기업들이 수소 사업에 과감하게 나설 수 있는 이유는 기술 경쟁력 때문만이 아니라, 제도가 사업 리스크를 제도적으로 흡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리스크 관리의 공백을 규제가 대신 메우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보험과 보증이 없으니 모든 책임이 규제기관으로 집중되고, 규제기관은 필연적으로 ‘제로 리스크’를 목표로 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안전검사·기준·절차는 시간이 갈수록 보수적으로 강화된다. 이 과정은 겉으로는 '안전 확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규제가 산업의 질주를 통제하는 메커니즘이다. 수소 저장 기준, 운송 기준, 누출 기준, 간접배출 산정 기준이 조금씩 강화될 때마다 사업의 불확실성은 확대되고 투자자는 이탈한다. 보험이 없으면 안전검사라는 이름으로 산업의 속도가 제한되기 시작한다.

사실 한국에는 리스크 관리 경험이 없는 것이 아니다. 발전사업에서는 EPC와 기자재 공급사가 성능보증 계약을 체결하고, 석유·가스·화학 플랜트는 시설손해보험과 공정중단(BI) 보험을 폭넓게 활용한다. 한국무역보험공사는 중·장기 수출계약 및 해외투자에서 수입자 미지급, 정치·환율 리스크를 보장하며, 수출입은행·산업은행은 에너지·인프라 프로젝트에 금융·보증을 제공해왔다. 즉, 한국이 리스크관리 능력이 없는 나라가 아니라, 수소·암모니아에 특화된 제도화가 늦어지고 있어, 이 공백이 향후 수소경제의 속도를 제한할 위험이 있다.

청정수소발전 의무화제도(CHPS)는 이 문제를 그대로 드러낸다. CHPS는 2024년 5월 세계 최초의 청정수소발전 경쟁입찰을 개설했고, 한국남부발전은 첫 입찰에서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어 2028년부터 삼척그린파워 1호기에서 석탄·암모니아 혼소를 추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2025년 입찰이 취소되는 등 거버넌스 불안정성이 노출됐다. 제도 도입은 세계 최초였지만, 청정수소 인증 기준 변화, 연료 공급 차질, 가격 변동 등 핵심 리스크를 누가 어떻게 분담할지에 대한 설계는 충분히 마련되지 못했다.

지금 필요한 정책의 방향은 다음과 같이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청정수소 프로젝트 보증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한다. 산업부·기재부·K-SURE·수은이 함께 참여하여 기술·규범·가격 리스크를 프로젝트 단위로 공동 분담하는 체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해외 ECA처럼 대규모 청정수소 프로젝트에 대해 일정 비율의 보증 또는 보험이 적용되는 구조가 구축되어야 한다.

둘째, 청정수소 인증제와 CHPS에 ‘리스크 관리계획 제출’을 제도의 핵심 요건으로 의무화해야 한다. LCA 산정 방식, 성능보증 구조(EPC·OEM), 보험 가입 계획, 오프테이크 구조 등 사전 리스크 맵을 제도에 포함시켜야 제도가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

셋째, 울산과 같은 수소 거점에는 ‘수소·암모니아 리스크 관리센터’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LCA 검증, 성능 측정, 누출·부식 평가, 운영 리스크 진단 등을 통해 국제 금융기관이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수소경제에서 지금 한국이 놓치고 있는 마지막 퍼즐은 보험·보증·위험분담 체계라는 보이지 않는 인프라이다. 이것을 갖추지 못하면 한국은 실증국가로 남고, 갖추면 수소경제의 완성형 모델을 세계에 제시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