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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에너지 톺아보기] 규제의 시대를 넘어 시장 설계의 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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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에너지 톺아보기] 규제의 시대를 넘어 시장 설계의 시대로

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단장(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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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단장(국제정치학 박사)
탄소중립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세계는 거대한 규범 전쟁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탄소는 이제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니다. 무역이고 금융이며 산업경쟁력이고 국가전략이다.
유럽연합(EU)은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통해 탄소를 사실상 새로운 통상 기준으로 만들고 있다. 미국과 중국 역시 자국 산업 보호와 기술 패권 확보를 위해 저탄소 산업정책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탄소를 얼마나 줄였는지가 아니라 누가 새로운 질서를 설계하느냐의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2015년부터 배출권거래제(K-ETS)를 운용하며 발전·철강·석유화학·시멘트·반도체 등 주요 산업을 제도 안에 포함해 왔다.
정부는 제4차 계획기간(2026~2030년)에 유상할당 확대와 시장안정화 장치 도입 등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우리 탄소시장은 아직 '탄소중립을 설계하는 시장'이라기보다 '규제를 관리하는 시장'에 가까운 측면이 강하다.
기업들은 탄소를 미래 투자 기회보다 추가 비용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고, 탄소가격은 충분히 강력한 투자 신호를 만들지 못하고 있으며, 탄소감축 실적이 산업 혁신과 실제로 연결되는 구조도 여전히 미흡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이 따로 있다. 탄소를 줄이는 것 자체가 과연 정책의 최종 목표인가 하는 점이다. 탄소중립 정책의 진짜 목표는 단순히 배출량 숫자를 줄이는 데 있지 않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산업이 태어나고,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며, 새로운 시장과 일자리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탄소중립은 비용이 아니라 성장전략이 된다. 산업을 약화시키면서 탄소를 줄이는 정책은 지속할 수 없다.
산업경쟁력을 강화하면서 탄소를 줄일 수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탄소중립이다.

필자는 2009년 한국에너지공단 중국사무소 주재 시절, 베이징산권거래소와 배출권거래 협력체계를 구축한 경험이 있다. 당시 중국은 탄소감축을 어디까지나 선진국의 부담으로 인식하며 자국 내 강제 감축 의무 도입은 최대한 늦추려 했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은 완전히 달라졌다. 세계 최대 탄소배출권 시장을 운영하며 태양광·배터리·전기차·희토류·청정에너지 공급망까지 글로벌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탄소시장을 외부 규제가 아닌 산업 패권과 시장 지배력 확보의 수단으로 전환한 것이다. 같은 시기 한국은 탄소규범 대응에 많은 역량을 투입했지만, 탄소시장을 활용한 산업 생태계 조성과 시장 확대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방어적 접근에 머물렀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정부 규제의 역할 길을 틀어막는 데 있어서는 안 된다. "이 길은 이제 비용이 커질 것이니 앞으로는 저 길로 가라"고 안내하는 표지판이어야 한다. 기업과 시장이 미래 방향을 스스로 읽고 자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신호를 주는 것이 진짜 규제 정책이다.
진흥 정책도 마찬가지다. 보조금으로 낡은 시장을 연명시키는 방식은 한계가 분명하다. 청정수소, 저탄소 철강, 탄소감축 크레딧, RE100 전력 등이 실제로 거래되고 가격이 형성되며 산업 생태계가 작동하는 시장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한 가지 구조적 문제도 짚어야 한다. 환경오염 물질 배출을 감시하고 억제하며 규제하는 부처가 동시에 시장 기능을 활용해 새로운 산업을 육성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는 구조인가 하는 점이다.
규제기관은 위험을 줄이고 통제하는 데 익숙한 조직이고, 산업과 시장은 새로운 기술과 투자, 불확실성을 감수하며 성장하는 생태계다. 하나의 부처 안에서 규제와 진흥이라는 상반된 목표가 충돌하며 정책의 일관성을 약화시킬 가능성도 있다.
탄소중립이 이미 환경 영역을 넘어 산업·무역·금융·에너지·외교가 결합된 복합 전략 영역으로 확장된 만큼 이는 특정 부처의 문제가 아닌 국가 전략 설계의 구조적 과제다.

결국 지금 필요한 것은 탄소 숫자 감축에만 집착하는 정책이 아니다. 탄소중립 과정에서 어떤 산업을 키우고, 어떤 기술을 확보하며, 어떤 시장을 만들 것인지에 대한 국가 전략이다. 탄소중립은 환경정책이 아니라 산업전략이며, 에너지전략이고, 국가 생존전략이다.

탄소시장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은 배출량 숫자가 줄어드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장이 움직이고, 기술이 발전하고, 기업이 투자하고, 새로운 산업이 성장하는 구조가 만들어질 때 비로소 탄소시장은 제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규제는 벽이 아니라 표지판이어야 하고, 탄소시장은 처벌 장부가 아니라 미래 산업의 설계도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