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그런데 여기에는 안타까운 역설이 있다. 불신이 강한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오히려 신중하고 유연한 태도를 취할 것 같은데 사실은 단정적이고 강한 확신을 내세우는 지도자에게 끌리기 쉽다는 것이다. "내 말만이 진실이다", "우리 편만이 옳다", "의심하는 자는 적이다"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힘을 얻는다. 불신이 합리적 의심으로 성숙하지 못하고, 근본주의적 확신으로 굴절되는 것이다.
여기서 근본주의란 특정 교리나 이념을 오류 없는 절대 진리로 여기고, 그에 대한 질문이나 재해석을 믿음과 공동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말한다. 근본을 소중히 여기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자신이 이해한 근본을 진리 그 자체와 동일시하고, 다른 해석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데 있다.
신뢰는 불신이 없는 것이 아니다
전생애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rik H. Erikson)이 제시한 첫 번째 발달 과제는 '기본적 신뢰 대 불신'이다. 여기서 건강한 발달이란 신뢰가 불신을 완전히 제거한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즉 불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아니다. 불신이 없기 때문에(because of) 믿는 것이 아니라 불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믿는 것이 성숙한 믿음이다. 인간은 누구나 기대가 어긋나고, 관계에서 상처받으며, 세상이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경험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성숙한 신뢰는 신뢰 100, 불신 0의 상태가 아니라 신뢰 51, 불신 49에 가깝다. 신뢰와 불신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몰아내는 관계가 아니라 비율로 존재하는 관계다. 불신보다 신뢰가 조금이라도 크면 그 사람은 불신하지만 신뢰하는 사람이 되고, 그 반대라면 믿지만 불신하는 사람이 된다.
아기가 세상을 신뢰하게 되는 것은 어머니가 언제나 즉각적으로 욕구를 채워주기 때문이 아니다. 배고픔을 견뎌야 할 때도 있고, 울어도 곧바로 응답받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전체 경험을 통해 "그래도 나는 완전히 버려지지 않는다", "기다리면 결국 누군가 응답한다"는 감각이 불안보다 조금 더 우세해질 때 비로소 기본적 신뢰가 형성된다. 신뢰는 완벽한 충족이 아니라 좌절을 겪은 뒤에도 관계가 회복되고 지속되는 경험에서 자란다.
이 관점에서 보면 한국 사회의 불신은 단지 배신과 실패를 많이 경험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배신 이후의 사과와 책임, 갈등 이후의 회복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잘못이 드러나면 인정하기보다 부인하고, 책임지기보다 남에게 책임을 돌리는 일이 반복되어 왔다. 갈등이 생기면 대화로 풀기보다 덮어두거나 관계 자체를 끊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기본적 신뢰는 한 번도 실망하지 않을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기대가 어긋난 뒤에도 다시 응답받고 손상된 관계가 회복되는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불신을 품고도 관계를 유지하고, 의심하면서도 대화를 이어 가며, 잘못을 인정하고 함께 고쳐 나가는 경험이 부족했다. 그래서 불신이 생기면 사실을 확인하고 관계를 조정하기보다 상대를 배제하거나 자기 진영의 확신 속으로 숨어드는 쪽을 택하게 된다.
근본주의는 강한 믿음이 아니라 불안의 방어다
근본주의는 흔히 믿음이나 소신이 지나치게 강한 상태로 이해된다. 그러나 심리적으로 보면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울 수 있다. 근본주의적 확신은 깊은 신뢰의 표현이라기보다 견디기 어려운 불안을 덮기 위한 방어일 가능성이 크다. 자신의 믿음이 안정되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질문을 들을 여유가 있다. 반대 의견이 나타나도 자기 존재 전체가 무너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면의 신뢰가 약한 사람에게는 작은 의문조차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온다. 그럴 때 사람은 질문 자체를 금지하고, 자기 생각을 절대화하며,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악하거나 무지한 존재로 규정해 버린다.
정치적·종교적 근본주의와 확실성
정치적 근본주의도 같은 심리 구조를 갖는다. 민주주의는 내가 지지하는 사람도 틀릴 수 있고, 내가 반대하는 사람에게도 옳은 점이 있을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작동한다. 서로를 온전히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권력을 나누고, 절차와 견제 장치를 두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건강한 불신은 오히려 민주주의를 지키는 힘이다.
그러나 불신을 견디는 능력이 부족한 사회는 절차보다 강한 지도자를 원하게 된다. 복잡한 현실을 설명하는 사람보다 선과 악을 단순하게 나누고 적을 지목해 주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안도감을 느낀다. 이때 정치적 선택은 정책에 대한 판단을 넘어 일종의 신앙고백처럼 변질된다. 지도자에 대한 비판은 곧 나에 대한 공격으로 느껴지고, 그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은 배신처럼 여겨진다. 사실은 소속감 앞에서 힘을 잃고, 대화는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한 싸움으로 변한다. 불신이 큰 사회가 역설적으로 특정 지도자와 이념에 대한 맹신을 낳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교적 근본주의와 정치적 근본주의가 쉽게 결합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둘 다 불확실한 현실을 견디기보다 절대적으로 옳은 답과 완전히 선한 우리 편, 그리고 반드시 제거해야 할 적을 제시한다.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정리해 주기 때문에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그것은 신뢰에서 오는 평안이 아니라 불신을 억누름으로써 얻는 일시적 안도에 가깝다. 억눌린 불신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한 충성과 더 엄격한 경계, 더 많은 적을 요구하게 된다.
종교적 신앙도 다르지 않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언제나 즉시 응답하고 고난의 이유가 모두 설명되며 어떤 의심도 남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라기보다 이미 확인된 앎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는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배워서 알 뿐이다. 하지만 실제 신앙은 하나님의 침묵과 현실의 부조리, 고통과 의심이 여전히 남아있음에도 "그래도 신뢰해 보겠다"는 쪽으로 삶의 무게 중심을 옮기는 일이다. 믿음은 불신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불신이 있음에도 신뢰가 조금 더 앞서는 상태다. 신앙은 100대0의 확실성이 아니라 51대49의 방향성이다. 49의 불신을 부정하거나 정죄하지 않으면서도 51의 신뢰가 삶의 방향을 정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믿음이라 할 수 있다.
신뢰는 구호가 아니라 경험의 산물
사회적 신뢰 역시 "서로 믿자"는 구호만으로는 생기지 않는다. 약속이 지켜지고, 잘못을 인정하며, 책임지는 경험이 반복되어야 한다. 의견이 달라도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권력을 비판해도 적으로 몰리지 않으며, 실수한 사람에게 사과와 회복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신뢰는 말이 아니라 관계와 제도 안에서 일관되게 축적된 경험에서 자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신을 없애는 사회가 아니다. 건강한 불신은 권력을 감시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순기능을 한다. 필요한 것은 불신을 인정하되 그것에 지배당하지 않는 사회다. 의심하되 대화를 멈추지 않고, 비판하되 상대를 비하(卑下)하지 않으며, 확신하되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여백을 남기는 태도가 필요하다.
한국 사회가 근본주의에서 벗어나는 길은 믿음과 소신을 약화시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불신과 질문을 품을 만큼 신뢰를 성숙시키고, 손상된 관계도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경험을 함께 쌓아 가는 데 있다. 신뢰 51, 불신 49. 그 근소한 차이가 한 사람을 앞으로 걷게 하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가능하게 한다.
이미지 확대보기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