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자사주는 원래 불법이었다. 기업이 자기 회사의 주식을 돈을 주고 사들이는 행위는 19세기 자본주의 법정에서 사기이자 배임, 아주 중대한 범죄로 다루어졌다. 1887년 영국 최고법원 격인 귀족원(House of Lords) 법정에 한 파산 관재인이 소송을 제기했다. 면직물 제조기업인 '위트워스(Whitworth)' 사가 사망한 주주의 유가족으로부터 거액의 회사 돈을 들여 고인의 주식을 되사준 사건이었다. 회사가 부도에 직면하자 채권자들은 회사의 자산이 부당하게 유출되었다며 반발했다. 당시 판사 허셜(Herschell) 경은 단호한 판결을 내렸다.
"회사가 자신의 주식을 매입하는 것은 주주에게 출자금을 몰래 환급해주는 행위이며, 이는 채권자의 담보가 되는 자본금을 불법으로 잠식하는 행위다."
이른바 '트레버 대 위트워스(Trevor v. Whitworth)' 판결이다. 이 판결 이후 영미법계는 물론 독일과 프랑스 등 대륙법계 전반에 걸쳐 '자본충실의 원칙'이 확립되었다. 회사는 주주에게 유한책임을 보장하는 대신 채권자를 보호하기 위해 자본금을 철저히 보존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기업이 자기 주식을 취득하는 것은 시세조종과 내부자거래, 그리고 지배주주의 지배권 사유화를 낳는 불법 행위로 규정되어 법적으로 전면 금지되었다. 1982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Rule 10b-18'을 제정해 시장 조작 혐의를 면책해 주기 전까지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자사주 매입은 자본시장의 금기였다.
100년의 금기에서 주주환원의 도구로: 제도 변천의 팩트
자사주 취득이 전면 금지에서 합법의 영역으로 진입한 과정은 철저히 기업 환경과 규제 당국의 정책적 타협의 산물이었다.우선 1982년에 제정된 미국 SEC의 'Rule 10b-18'이 그 분수령이었다. 미국 1970년대의 극심한 스태그플레이션과 1980년대 기업 사냥꾼(Corporate Raiders)에 의한 차입매수(LBO) 돌풍은 기업 경영진을 압박했다. 저평가된 주가와 적대적 M&A 위협에 직면한 기업들은 합법적인 주가 방어 수단을 요구했다.
1982년 11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증권거래소법(Securities Exchange Act of 1934) 제10조(b)호 및 규칙 10b-5의 시세조종 금지 조항에 대한 안전지대(Safe Harbor)로서 Rule 10b-18을 공식 채택했다. 네 가지 요건을 충족하면 자사주 취득을 주가조작 행위로 처벌하지 않겠다는 면책 규정이었다. 그 4가지 조건이란 첫째 단일 중개인, 즉 하루 동안 단 하나의 브로커(증권사)를 통해서만 주문을 집행할 것. 둘째 거래 시점, 즉 장 개시 직후 10분, 장 마감 직전 30분(일정 유동성 종목은 10분) 동안 매수 주문을 내지 말 것 셋째 거래 가격, 즉: 직전 독립 거래 가격 또는 현재 최고 독립 호가를 초과하는 가격으로 매수하지 말 것.그리고 넷째 거래 수량 즉 4주간 평균 일일 거래량(ADTV)의 25%를 초과하여 매수하지 말 것 등의 조건을 충족할 경우에만 처벌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이 안전지대가 구축되면서 미국 기업들의 현금 배당 중심 정책은 자사주 매입으로 급격히 전환되었다.
한국 상법 역시 과거 제341조에서 "회사는 자기의 계산으로 자기의 주식을 취득하지 못한다"고 명시하며 전면 금지 기조를 유지했다. 변화의 계기는 시장 개방과 외환위기였다. 1994년 5월 증권거래법 개정이 그 시발점이다. 주식시장 개방에 따라 외국인 투자자의 적대적 M&A 위협에 대응한다는 명분으로 상장사에 한해 발행주식 총수의 5% 한도 내 자사주 취득을 허용했다. 1997~1998년 외환위기도 자사주 도입에 큰 전환점이 됐다. 주가 폭락을 방어하고 구조조정을 지원하기 위해 취득 한도를 단계적으로 완화했다.2011년 상법 개정(2012년 4월 시행)은 결정적 변신이다. 상법 제341조를 개정하여 배당가능이익(순자산액에서 자본금, 법정준비금 등을 공제한 금액) 범위 내에서 상장·비상장 여부를 불문하고 주주총회나 이사회 결의로 자사주를 자유롭게 취득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로써 자사주는 원칙적 금지에서 원칙적 허용 체제로 전환되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조 단위 자사주 매입 집행은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에 즉각적인 수급 변화를 일으켰다. 이 조치가 증시를 지지하고 원화 강세를 견인한 메커니즘은 우리 경제 전체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주가는 기업의 내재가치와 시장의 수급에 의해 결정된다. 글로벌 반도체 다운사이클과 거시경제적 불안으로 기관과 외국인의 매도 물량이 쏟아질 때, 대규모 자사주 매입은 가격 하락을 저지하는 유효 수요(Effective Demand)를 창출한다. 자사주는 또 재무제표상의 지표를 개선시킨다. 자사주를 매입하거나 소각할 경우 발행주식 수 및 유통주식 수가 줄어들어 주당순이익(EPS)과 자기자본이익률(ROE)이 기계적으로 상승한다. 이는 동일한 밸류에이션 배수(PER) 하에서도 목표주가를 끌어올리는 효과를 발생시켜 퀀트 펀드와 패시브 펀드의 시스템 매수를 유발하고 있다.
원/달러 환율이 급격히 안정된 배경에도 반도체 기업들의 현금 보유 구조가 있다. 해외 보유 달러의 국내 환전이 환율 변동의 핵심요인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수출 비중이 절대적이며,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의 상당 부분을 미국 달러화로 보유한다. 국내 증시에서 원화로 주식을 사들이기 위해서는 보유 달러를 시장에 매도하고 원화를 매수해야 한다. 이는 서울 외환시장에서 직접적인 달러 매도(달러 공급 증가) 압력으로 작용하여 환율 상승세를 꺾었다.
외국인 투자 자금의 환류도 원화가치 상승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형 반도체주의 주가 안정세가 코스피 지수의 하방을 지지하자, 환차손 우려로 이탈하던 외국인 자금이 매수세로 돌아섰다. 외국인이 국내 주식을 매수하기 위해 달러를 팔고 원화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원화 수요가 추가로 폭증했다. 두 대형 기업의 자사주 매입은 한국 외환보유액이나 무역수지와 무관하게 민간 부문에서 즉각 집행 가능한 '달러 유동성 공급원'으로 시장에 인식되며 투기적 원화 매도 포지션의 청산을 유도했다.
자사주 경제학의 한계와 실질적 문제점
자사주 매입이 시장 안정화에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적으로 이 수단이 무제한으로 작동할 수는 없다. 자사주 매입에는 명확한 기회비용과 왜곡 구조가 내포되어 있다. 미국 증시(S&P 500)에서 집행되는 자사주 매입의 90% 이상은 취득 즉시 소각 절차를 밟는다. 주식을 완전히 없애야만 발행주식 총수가 영구적으로 감소하여 1주당 가치가 온전히 보존된다.
반면 한국 상법 체계에서는 자사주 매입과 소각이 분리되어 있다. 매입한 자사주를 소각하지 않고 법인의 자산으로 보유하는 경우, 이는 언제든 시장에 다시 매물로 출회될 수 있는 오버행(Overhang) 리스크로 남는다. 회사가 재무적 필요에 따라 이를 처분할 경우 시장 공급이 늘어나 주가는 희석된다. 소각이 담보되지 않은 자사주 매입은 주주환원이 아니라 단순한 단기 주가 관리 행위에 가깝다.
자본의 본질은 생산성 향상에 있다. 기업 잉여현금흐름(FCF)의 배분은 제로섬(Zero-sum) 구조다. 조 단위의 자금을 자사주 매입에 투입한다는 것은 그만큼 차세대 기술 개발과 설비투자에 쓰일 자본을 줄인다는 뜻이다. 반도체 산업은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도입, 차세대 HBM 및 패키징 기술 선점, 미세공정 전환에 천문학적 자본적 지출(CAPEX)이 요구되는 전형적인 수확체증형 산업이다. 주주가치 제고라는 명분으로 과도한 유동성을 주식 매입에 소진할 경우, 경쟁사(TSMC 등)와의 기술 격차 유지에 필요한 적기 투자를 놓칠 위험이 발생한다. 금융공학적 기교로 EPS를 관리하는 방식은 단기 주가를 부양할 수 있을지언정, 장기 수주 경쟁력과 제조 생산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한국 자본시장에서 자사주는 대주주의 지배권 유지 수단으로 오용되어 온 흑 역사가 있다. 상법 제369조 제2항에 따라 회사가 가진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다. 그러나 이 주식을 제3자(우호적 지분, 백기사)에게 처분하거나 교환하면 의결권이 되살아난다. 과거 인적분할 과정에서 발생했던 '자사주의 마법'이 대표적이다. 존속 지주회사와 신설 사업회사로 쪼갤 때 지주회사가 보유한 자사주에 신설 회사의 신주를 배정함으로써, 지배주주는 사재를 출연하지 않고도 지배력을 증폭시켰다. 이처럼 자사주가 전체 주주의 이익이 아닌 지배주주의 경영권 방어 카드로 전용될 수 있다는 제도적 허점은 자사주 제도가 안고 있는 치명적인 도덕적 해이다.
자사주 매입은 현금 유동성에 의존한다. 영업활동현금흐름이 흑자를 지속하고 유보 현금이 충분할 때만 집행 가능하다. 업황이 악화되거나 글로벌 경기 침체로 현금 유입이 줄어들면 자사주 매입은 즉각 중단된다.펀더멘털 개선 없는 자사주 매입에 의한 환율 안정과 주가 방어는 영속될 수 없다. 기업의 현금 유출입 곡선이 꺾이는 순간 지탱되던 수급의 방파제는 일거에 무너질 수 있으며, 시장은 다시 기초체력에 수렴하는 변동성을 노출하게 된다.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자사주 매입은 복합적 위기 국면에서 시장의 신뢰를 유지하고 외환시장의 쏠림을 막아낸 실효적 개입이다. 1887년 영국 법정이 자사주를 자본충실 원칙의 위반으로 단죄한 지 140여 년 만에, 자사주는 국가 대표 기업들의 시장 방어 수단으로 진화했다.
문제는 이 자사주 효과가 일회성 수급 착시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확립되어야 한다. 첫째, 자사주 취득 후 소각의 의무화 및 제도화다. 단순히 취득 공시만으로 주가를 부양한 뒤 금고에 묶어두거나 경영권 거래의 도구로 활용하는 구조를 차단해야 한다. 자사주를 취득한 경우 일정 기한 내에 소각하도록 명문화하거나, 제3자 매각 시 신주 발행에 준하는 엄격한 주주 보호 절차를 상법과 자본시장법에 반영해야 자사주 매입이 온전한 주주환원으로 귀결된다. 둘째, 본원적 기술 경쟁력의 보존이다. 자사주 매입은 시간을 벌어주는 도구일 뿐 제품의 수율을 높이거나 수주 계약을 성사시키지 못한다. 금융공학을 통한 주당 지표 개선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초격차 기술을 향한 R&D와 전략적 설비투자다.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불법의 오명을 벗고 합법적 금융 도구로 정착한 자사주. 그러나 그 매입의 한계와 기회비용을 망각한 채 수급 효과에만 안주한다면, 오늘 우리를 지탱해 준 그 제도는 내일 기업의 성장을 갉아먹는 독소로 변질될 수 있다. 자사주는 결코 기업 경쟁력의 종착지가 될 수 없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