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버선 '전용 칩' 제작, PC선 'RTX 동거'…생존 위한 적과의 동침
1.4나노 공정 조기 개방 승부수…"2027년까지 적자 감수할 것"
1.4나노 공정 조기 개방 승부수…"2027년까지 적자 감수할 것"
이미지 확대보기지난 9월, 세계 반도체 시장을 뒤흔든 '사건'이 발생했다. 인공지능(AI) 시대의 절대 강자 엔비디아가 '종이호랑이'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인텔에 50억 달러(약 7조 원)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수혈한 것이다. 당시 시장은 이를 단순한 재무적 투자로 해석했지만, 그 이면에는 더욱 치밀하고 거대한 기술 동맹이 도사리고 있었다.
약 두 달의 침묵이 흐른 뒤인 20일(현지시각), 캐나다에서 열린 'RBC 2025 기술 컨퍼런스'에서 그 실체가 드러났다. 인텔의 존 피처(John Pitzer) 부사장이 공개한 양사의 협력 청사진은 사실상 인텔이 엔비디아의 하드웨어 생태계에 편입되는 것을 감수하겠다는 '백기 투항'에 가까운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외신 전문 매체 '퍼드질라(Fudzilla)'와 로이터 통신의 보도를 종합하면, 인텔은 이제 과거의 독자 노선을 버리고 철저한 '실리주의'로 돌아섰음이 명확해진다.
엔비디아 전용 '맞춤형 CPU'…굴욕 딛고 실리 택해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데이터센터 부문의 협력 모델이다. 피처 부사장의 발언에 따르면, 인텔은 엔비디아를 위해 '커스텀 제온(Xeon) x86 프로세서'를 설계하고 생산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인텔의 상징과도 같은 x86 아키텍처가 엔비디아의 독자 인터페이스 기술인 'NV링크 퓨전(NVLink Fusion)'에 종속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과거 PC와 서버 시장을 호령하며 모든 부품이 인텔 CPU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던 '인텔 인사이드'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심지어 피처 부사장은 암(ARM) 진영의 데이터센터 플랫폼인 '네오버스(Neoverse)' 역시 NV링크 퓨전을 채택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는 x86과 ARM이라는 양대 프로세서 진영이 모두 엔비디아의 AI 가속기 생태계 아래로 헤쳐 모이는 형국임을 시사한다. 인텔로서는 자존심을 버리는 대신, 폭발하는 AI 데이터센터 시장의 일감을 확보하는 '생존'을 택한 것이다.
인텔 칩에 엔비디아 심장 이식…'PC 동맹' 가속
서버 시장에서의 협력이 '수직적'이라면, 클라이언트(PC) 시장에서의 협력은 다소 '수평적'이면서도 교묘하다. 인텔은 차세대 고성능 노트북용 SoC(시스템온칩)에 엔비디아의 RTX 그래픽카드를 통합하는 설계를 추진 중이다.
이른바 '칩렛(Chiplet)' 기술 등을 활용해 CPU와 GPU를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내는 이 전략은 소비자에게는 고성능을, 제조사(OEM)에게는 설계 편의성을 제공한다. 인텔은 제품의 통합과 출시를 주도하고, 엔비디아는 그래픽 모듈의 판매를 맡는 식의 철저한 분업이다. 피처 부사장은 "OEM 제조사들이 RTX 그래픽 모듈을 자유롭게 선택해 다양한 사양의 노트북을 구성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경쟁사 AMD를 정밀 타격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CPU와 고성능 GPU를 모두 보유한 AMD에 맞서, 인텔과 엔비디아가 연합 전선을 구축해 시장 점유율을 방어하겠다는 전략이다. 피처 부사장은 향후 협력 관계가 무르익으면 고가 라인업을 넘어 중저가 시장까지 이 모델을 확대하겠다는 의지도 내비쳤다. 시장에서는 벌써부터 "이 거대 연합이 가격 경쟁을 주도할 경우, AMD가 설 자리가 좁아질 것"이라는 우려 섞인 분석이 나오고 있다.
"18A 실패 반복 없다"…1.4나노에 건 사활
이날 컨퍼런스에서 피처 부사장은 협력 모델뿐만 아니라, 인텔 재건의 핵심 키인 파운드리(위탁생산) 로드맵, 특히 '14A(1.4나노급)' 공정에 대해서도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 설명했다. 그의 발언에서는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그는 현재 인텔이 주력하고 있는 18A(1.8나노급) 공정 개발 과정에서의 실책을 솔직하게 시인했다. "18A 초기 단계에서는 외부 고객의 참여가 늦어져, 공정의 최적화가 인텔 내부 제품에만 편중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는 파운드리 사업의 본질인 '고객 친화적 생태계' 구축에 실패했음을 경영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하지만 14A는 다르다고 강조했다. 현재 기술 정의(Definition) 단계에 있는 14A 공정은 18A 때보다 훨씬 이른 시점부터 외부 고객사와 소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피처 부사장은 "초기부터 고객 피드백을 반영한 덕분에 PDK(공정 설계 키트)의 품질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하다"며 "우리는 14A R&D에 전력을 쏟아부고 있으며, 고객사와의 협업 상황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14A 공정에는 2세대 GAA(게이트-올-어라운드) 트랜지스터와 2세대 후면 전력 공급(Backside Power Delivery) 기술 등 인텔이 가진 최첨단 기술이 총동원된다.
"2027년까지 적자"…뼈 깎는 체질 개선 예고
혁신에는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피처 부사장은 투자자들에게 달콤한 장밋빛 미래 대신, 쓰디쓴 현실을 먼저 제시하는 정공법을 택했다. 그는 파운드리 사업의 손익분기점(BEP) 달성 시점이 당초 예상보다 늦어질 수 있음을 공식화했다.
"14A 공정 고객을 확보한다는 것은, 매출이 발생하기 2~3년 전부터 막대한 선행 투자가 집행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투명하게 말씀드리면, 이러한 비용 증가로 인해 손익분기점 달성은 2027년 말 이후로 미뤄질 가능성이 큽니다."
보통의 경영진이라면 악재를 감추려 급급했겠지만, 피처 부사장은 오히려 이를 '신뢰의 증거'로 역설했다. 적자 기간의 연장은 역설적으로 인텔이 확실한 외부 고객을 확보했고, 그들을 위한 생산 라인을 깔고 있다는 반증이라는 논리다. 그는 "대부분의 투자자는 이러한 적자를 용인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인텔이 껍데기뿐인 파운드리가 아니라, 진정한 파운드리 비즈니스를 구축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젠슨 황의 50억 달러(약 7조 원) 투자는 인텔에게 단순한 자금 지원이 아니라, '엔비디아'라는 확실한 고객을 묶어두는 족쇄이자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자존심을 버리고 엔비디아의 파트너로 변신한 인텔, 그리고 당장의 적자를 감수하며 1.4나노 초미세 공정에 사활을 건 인텔의 도박이 과연 2027년 이후 화려한 부활로 이어질지, 아니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지 전 세계 반도체 업계가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