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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에너지 톺아보기] 북극항로는 에너지 질서를 다시 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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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에너지 톺아보기] 북극항로는 에너지 질서를 다시 짠다

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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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


북극항로는 오랫동안 가능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국제 정세, 기후 변화, 에너지 지형 변화가 겹치며 이 항로의 성격이 달라지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아직 종식되지 않았지만, 다양한 형태의 조기 마무리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러시아가 전쟁 이전에 추진하던 북극 개발 전략을 다시 가동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야말과 노보포르토프 등 북극권 프로젝트가 중단되지 않고 유지되는 흐름은 이를 뒷받침한다. 이러한 변화는 북극항로를 단순한 해상 루트가 아니라, 에너지 공급망 변화와 직결되는 전략 공간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기후 데이터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북극 해빙 면적은 4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감소했고, 상업 운항 가능 기간이 과거 2~3개월에서 4~6개월 수준으로 늘어날 수 있다는 분석이 국내외 연구에서 제시된다. 해빙 변화를 반영해 항로를 조정하는 ‘무빙 코리더’ 운항 방식이 확립되면 계절 의존도가 줄고 위험 요인도 체계적으로 관리된다. 기존 공급망은 수에즈 운하 정체, 홍해 지역 분쟁, 보험료 상승 등으로 불안정성이 커졌고, 기업들은 북극항로를 '대체 경로'가 아니라 위험 분산 효과가 있는 전략 항로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특히 북극항로에서는 기상·해빙 위험이 크기 때문에 관제·보험·금융의 결합이 필수적이다. 단순한 해상교통 관리가 아니라, 위성 기반 관측·해빙 예측 모델·AIS 데이터·선박 성능 정보가 실시간으로 통합되는 관제 체계가 요구된다. 이러한 데이터는 보험료 산정, 항로 선택, 운항 속도 조절, 선주·화주의 비용관리까지 직결되기 때문에 금융권의 참여를 촉진하는 요인이 된다. 리스크가 투명하게 계량되면 보험 인수 범위가 넓어지고, 이는 다시 항로 이용 확대를 가능하게 한다. 북극항로가 실제 상업 항로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신뢰 가능한 관제·데이터·보험 시장의 구축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울산이 가진 디지털 역량은 의미가 크다.

북극항로는 에너지·조선·AI·항만 산업이 결합된 새로운 경제권 형성을 예고한다. LNG·암모니아·수소의 공급 구조가 달라지고, 쇄빙 LNG선과 극지형 컨테이너선 같은 특수선박 수요도 확대된다. 북극 개발 사업은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하기에 해상 SMR·MSR 도입 가능성도 커진다. 또한 IMO 환경규제가 강화되면서 LNG·암모니아 기반 벙커링 수요는 필연적으로 증가할 것이며, 기상·해빙 변수가 많은 북극에서는 AI 기반 위험 예측과 보험 평가 시장이 동반 성장한다.

이 변화의 중심에 울산이 있다. 울산은 조선, 에너지, 수소, 항만, 석유화학, AI 기반 안전·관제 기술이 결집된 도시로, 북극항로 산업 구조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고빙등급 선박 제작 능력, LNG 저장·기화 설비와 180km 산업 수소 배관망, 암모니아 크래킹 실증 역량은 아시아에서 보기 어려운 경쟁력이다. 또한 울산·포항·경주가 추진 중인 해오름동맹은 청정수소, SMR 연계 전력, 특수강·바이오·이차전지 소재 등에서 협력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 동맹이 북극항로의 조선·에너지·관제 산업과 연동되면 동해권 전체가 하나의 에너지·제조·물류 클러스터로 확장될 수 있다.

한국이 지난 수십년간 축적해 온 에너지효율, 산업계 감축 경험, 재생에너지 통합 기술도 북극항로의 디지털 안전관리, 청정연료 인증, 항만 운영 효율화 같은 분야에서 활용도가 높다. 울산이 북극항로의 아시아 관문 후보로 거론되는 이유는 이러한 구조적 기반 때문이다.

결국 북극항로는 새로운 국제 공급망을 꿈꾸는 개념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변화의 연장선에 있다. 울산·부산·포항을 잇는 동해 축이 하나의 전략권으로 움직일 때, 동북아의 청정에너지와 북극 물류 주도권을 확보할 가능성은 더욱 커질 것이다. 북극항로는 동북아 지중해 구상의 출발점이며, 그 관문은 울산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