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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겨울 숲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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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겨울 숲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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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숲에서, 백승훈 시인
나이 한 살 보탠 티를 내는 것일까. 달력 한 장 바꾸어 걸었을 뿐인데 겨울을 건너는 몸이 자꾸 삐걱거린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집 안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다는 가벼운 산책이라도 하며 몸을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새벽에 눈이 내렸는지 온 동네가 눈에 덮여 흰빛으로 가득하다. 동네 골목길을 돌아 둘레길로 이어지는 숲 들머리에 이르니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어지럽다. 발자국을 따라 둘레길로 들어서니 잎을 떨구어 앙상한 나뭇가지마다 흰 눈꽃이 피어서 허룩하던 숲에 오히려 생기가 도는 듯하다. 밤새 아우성치던 골바람도, 숲속 빈터의 낙엽들도 흰 눈에 덮여 고요한데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어디선가 딱따구리가 죽은 나무를 쪼아대는 소리가 들려오고, 까치 소리가 새벽 숲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

늘 다니던 길도 눈이 내리면 낯설고 서툴다. 숲길을 걷다 보면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생각들이 가지런해지곤 했는데 눈길에선 걸음에 집중하다 보면 걷는 것 외엔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다. 눈이 내려 한결 고요해진 겨울 숲에서 오직 걷는 일에만 몰입하는 것도 좋지만 이따금 잠시 걸음을 멈추고 겨울 숲의 차고 서늘한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한껏 예민해진 감성의 촉수를 바짝 세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겨울이야말로 온전히 나무만을 감상할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겨울엔 잎에 가려져 있던 숲의 비밀스러운 모습과 겨울나무 수형(樹形)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거기에 눈까지 내리면 쓸쓸한 기운이 감돌던 숲이 한결 풍요롭고 생기마저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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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숲에서, 백승훈 시인

눈을 이고 선 소나무 가지들이 처져 있고, 솔잎에 얹힌 눈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다. 떡갈나무 가랑잎에도 눈이 쌓여 목화송이처럼 보인다. 활엽수들이 모두 잎을 떨군 채 나목으로 봄을 기다리는 겨울 숲에서 크고 누런 잎을 달고 있는 나무가 다름 아닌 떡갈나무다. 참나무 종류 중에서 가장 큰 잎을 달고 있는 떡갈나무는 예전에 떡을 찔 때 밑에 깔았다고 하는데, 떡갈나무는 겨울이 와도 마른 잎을 달고 있다. 활엽수 중에서 겨울에도 여전히 마른 잎을 달고 있는 대표적인 나무는 단풍나무 종류다. 단풍나무가 겨울에도 잎을 달고 있는 것은 잎자루 안에 숨어있는 겨울눈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떡갈나무 역시 잎 아랫부분이 겨울눈을 감싸고 보호하고 있다.

식물학에서는 이렇게 마른 잎을 단 채 겨울을 나는 현상을 ‘marcescence’라고 한다. ‘(잎이) 시들었지만 떨어지지 않은’이라는 뜻인데 생리적으로는 잎과 가지를 분리하는 이층(離層)의 발달이 불완전하고 미완성이어서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한다. 자연은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활엽수라 해서 겨울이면 모두 잎을 떨구는 것이 아닌 것처럼 잎이 지는 나무는 나무대로, 잎을 달고 있는 나무는 그 나무 나름의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차고도 고요한 기운에 휩싸인 겨울 숲을 산책하며 나는 아직도 멀기만 한 봄을 기다리는 겨울나무들의 고요한 침묵을 흉내 내고 싶어졌다.

몸속에 나이테를 숨기고 있는 나무들은 나이 한 살 더 먹었다고 호들갑을 떨지도 않고, 찬 북풍과 눈보라에 시달려도 묵묵히 겨울을 인내하며 봄을 기다린다. 비운다고 말하면서도 비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무들은 온몸으로 보여준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떡갈나무는 떡갈나무대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겨울을 난다. ‘세상이 정한 획일적 목표에 끌려가지 않고, 주체적 결단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게 행복의 본질’이라고 한 존 스튜어트 밀의 말처럼 타인과 비교하는 대신 자존감을 키우고, 가진 것에 만족하며 감사할 줄 알면 행복은 저절로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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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