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이끄는 성장 이면의 '인재·에너지' 그림자
"어느 국가도 홀로 설 수 없다"...공급망 다변화 속 韓·대만 역할론 부상
"어느 국가도 홀로 설 수 없다"...공급망 다변화 속 韓·대만 역할론 부상

세계 반도체 산업이 인공지능(AI)이라는 거대한 성장 동력을 맞이한 가운데, 지정학의 격랑 속에서 미래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중차대한 시기에 세계 최대 반도체 산업 협회인 SEMI(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의 아짓 마노차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가 '탈 미·중' 구도의 글로벌 협력 생태계를 핵심 화두로 제시해 주목된다.
20일(현지시각) 디지타임스에 따르면 SEMI의 아짓 마노차 회장은 최근 18년 만의 최대 흥행을 기록한 '세미콘 웨스트 2025' 현장에서 "반도체 생태계는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초강대국을 넘어 대만, 유럽, 일본, 한국, 동남아시아, 인도 등으로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의 발언은 반도체 자립을 위한 각국의 막대한 투자와 지역화 흐름 속에서도, 어느 한 국가나 지역이 홀로 생태계를 완성할 수 없다는 현실을 명확히 짚은 것이다.
18년 만의 최대 흥행, 피닉스에서 확인한 산업의 열기
최근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막을 내린 '세미콘 웨스트 2025'는 전례 없는 열기로 가득 찼다. 마노차 회장은 "이번 행사의 에너지는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며 "방문객 수, 참가업체 규모, 기조연설, 토론회 모두 최근 몇 년 기록을 갈아치웠다"고 평가했다.
특히 이번 행사는 기존 중심지였던 샌프란시스코를 벗어나 피닉스에서 열렸는데도 참석자들의 호평이 이어졌다. 마노차 회장은 "피닉스 행사장에 대해 지금까지 어떤 불만도 나오지 않았다"며 성공적인 개최를 자평했다. 피닉스와 애리조나 지역은 TSMC, 인텔, ASML,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 같은 주요 반도체 기업의 대규모 투자로 새로운 반도체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이와 달리 샌프란시스코(실리콘 밸리)는 여전히 설계와 소프트웨어 중심의 연구개발 거점으로서 핵심 지위를 지키고 있다. SEMI는 앞으로도 업계 의견을 꾸준히 들어 최적의 개최지를 정할 방침이다. 이처럼 뜨거운 현장의 열기는 현재 반도체 산업이 마주한 여러 어려움에도 미래 성장에 대한 기대감이 얼마나 높은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AI가 쏘아올린 성장, '인재·에너지'가 발목 잡나
현재 반도체 산업의 모든 대화는 AI로 통한다. AI 수요는 업계 지형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변수로, 특히 고성능 컴퓨팅(HPC) 칩 분야의 큰 성장을 이끌고 있다. 마노차 회장은 이러한 흐름이 시장의 핵심 동력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화려한 성장 전망 이면에는 여러 난제가 있다. 그는 반도체 분야가 여러 역풍을 맞고 있다고 짚었다. 구체적으로 "반도체 기술자와 공정 전문가의 심각한 부족, 전력과 에너지 공급 불안정, 무역 관세 장벽, 그리고 중동, 동아시아, 우크라이나 등에서 터지는 예측 불가능한 지정학의 위험"을 핵심 도전 요인으로 꼽았다.
이러한 도전에 대응하는 SEMI의 전략은 '선택과 집중'이다. 마노차 회장은 "지정학이나 관세 같은 거시 문제는 SEMI가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다"고 선을 그었다. 대신 그는 "SEMI가 실질적으로 변화를 이끌 수 있고, 업계 전체가 시급한 과제로 공감하는 인재 양성과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 문제 해결에 모든 노력을 쏟고 있다"고 밝혔다.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통해 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지원하겠다는 협회의 확고한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2025년 반도체 시장은 '극심한 양극화' 현상, 곧 두 개의 상반된 흐름이 함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첨단 공정 노드를 바탕으로 한 HPC, GPU, AI 훈련용 칩 분야는 엔비디아, AMD, TSMC 등이 이끌며 빠르게 성장하는 반면, 성숙 공정에 바탕을 둔 자동차용 반도체나 일부 사물인터넷(IoT) 센서류는 단기 경기 둔화의 영향으로 주춤하고 있다.
하지만 마노차 회장은 이런 성장이 일부 첨단 칩 제조사에만 머물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그는 "AI 데이터센터가 성공적으로 돌아가려면 최첨단 HPC 칩뿐만 아니라, 전력관리, 통신, 저장장치용 MCU나 전력 반도체처럼 기반 시설을 떠받치는 방대한 양의 성숙 공정 칩이 꼭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AI 데이터센터에 대한 '수조 달러 규모의 세계 투자'는 전체 칩 공급망에 막대한 혜택으로 돌아가며, 메모리, 소재, 장비 부문까지 고르게 성장하는 구조를 만든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차량용 반도체의 부진은 일시적이고, 산업 전반의 장기 전망은 밝다"고 덧붙였다.
미·중 넘어선 다극 체제, '협력'만이 살 길
이번 인터뷰에서 마노차 회장이 가장 힘주어 말한 핵심 내용은 "반도체의 미래는 미·중 경쟁을 넘어선다"는 것이었다. 그는 최근 거세지는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제조업 경쟁에 대해 더 넓은 시야를 내놨다. 미국은 '반도체와 과학법'을 통해 제조업 부활을 꾀하고 있으며, 중국 역시 대규모 국유 펀드를 동원해 자급률 높이기에 사활을 걸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자립 노력이 시간이 지나면서 균형을 찾아갈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지역화를 향한 움직임에도, 어떤 나라도 완전한 자급자족은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 "세계 반도체 망 안에서 모든 참여자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에 SEMI는 국가별 분절보다 "상호 신뢰와 기술 협력 확대"를 장기 발전의 핵심으로 제시하며, 스스로의 역할을 단순한 산업 협회를 넘어 "세계 반도체 협력 기반"으로 새로 정의했다. SEMI는 앞으로 세계 인재 순환, ESG와 에너지 안보, 공급망 투명성 만들기에 초점을 맞춰 정치 구도를 넘어서는 산업 연대를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마노차 회장은 새로운 세계 반도체 지형에서 아시아 국가들의 중요성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만은 여전히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의 중심지로, 미국, 일본, 유럽과의 협력 중심지 역할을 키우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메모리 반도체와 장비·소재 분야에서 혁신의 균형추 역할을 맡고 있으며, SEMI 역시 두 나라 안에서 산학 협력을 통한 차세대 반도체 인재 교육 프로그램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나아가 동남아시아와 인도는 조립, 시험, 후공정 포장의 중심지이자 소재 공급망 다변화의 핵심 기지로 떠오르고 있다. SEMI는 2025년 뒤 이 지역에 회원사들의 연구개발(R&D) 연구소 설립이 크게 늘 것으로 예측했다.
마노차 회장이 던진 메시지는 명확하다. AI 열풍은 반도체 모든 생태계의 성장을 이끄는 강력한 동력이지만, 인재와 에너지처럼 풀어야 할 과제는 산업계 스스로가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반도체 산업이 미·중 경쟁이라는 틀을 넘어 다원화한 세계 연결망 산업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이러한 새로운 균형 구조 속에서 협력과 상생이 유일한 성장 해법이라는 점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