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 국제정치학 박사)
이미지 확대보기에너지는 청정하고 접근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도덕의 영역에서 벗어나 권력의 영역으로 급격하게 이동하는 중이다. 미국이 그린란드를 향해 노골적인 관심을 보이는 명분은 안보와 개발이다. 그러나 자원 접근권, 군사적 거점, 북극 항로라는 전략적 이익의 결합이 실상이다. 기후위기에서 인류를 보호하겠다는 서사는 국제정치의 뒤로 물러났고, 자원과 군사, 항로를 아우르는 북극 전략이 전면에 나섰다.
베네수엘라의 정권 붕괴는 막대한 자원이 국가 안정의 보증수표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란의 극심한 혼란 역시 국제 제재와 지정학의 교차점에서 에너지 자원이 어떻게 분쟁의 촉매로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관리되지 못한 자원은 오히려 불안정의 원천이 된다.
청정에너지 전환의 의미도 이제는 더 이상 함께 가는 여정이 아니다. 동행이 아니라 경쟁의 장이 되었다. 딜로이트 2023~2025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청정수소 시장은 2030년 6420억 달러를 거쳐 2050년 1.4조 달러 규모로 팽창할 전망이다. 주목할 점은 이 거대 시장의 90%를 중동, 북아프리카, 북미, 호주 등 특정 국가들이 장악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청정수소는 아직도 대규모 상용화 단계에 진입하지 못했다. 인프라 구축 비용, 운송과 저장의 기술적 한계, 그리고 무엇보다 경제성 확보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하지만 각국은 이미 선점 경쟁에 뛰어들었다. 시장이 형성되기 전에 규칙을 만들고, 공급망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의 'Global Hydrogen Review 2025'는 저배출 수소 프로젝트 중 실제 최종 투자 결정에 이른 비율이 여전히 낮음을 지적하면서도, 2026년을 기점으로 국가 간 선별적 보조금 전쟁이 본격화될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과 유럽연합의 수소은행은 자국 내 공급망을 구축한 기업에게만 혜택을 주는 기술적 봉쇄다. 그러니 준비된 전략이 없는 국가는 탄소 국경세라는 명목하에 자국 산업의 경쟁력을 송두리째 박탈당하는 경제적 질식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 구조 속에서 한국은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기술력은 있지만 자원은 없다. 수소를 생산할 재생에너지 잠재력도 제한적이다. 결국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수입처가 곧 에너지 안보의 취약점이 된다. 과거 석유 의존도가 높았던 시절, 중동 정세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것처럼, 앞으로는 수소 수출국의 정치적 안정성과 외교 관계가 국가 운명을 좌우하는 변수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술을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 기술을 산업화하고,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며, 글로벌 공급망에 편입시킬 수 있는 역량이 관건이다. 한국은 수소 기술 선진국으로 분류되지만, 실제 생산과 유통 인프라는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기술 보유와 시장 장악은 별개의 문제다. 청정에너지 전환은 더 이상 함께 가는 약속이 아니다. 살아남는 국가만이 전환할 수 있는 각자도생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이 질서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선의가 아니라 준비된 전략이다.
에너지는 다시 권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청정수소를 숭고한 기후 목표가 아닌, 국가의 생존을 담보할 가장 날카로운 전략적 자산으로 다루어야 한다.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기후 위기는 재앙이지만, 준비된 자에게 청정수소는 새로운 제국의 열쇠가 될 것이다.
한국은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기술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고리가 될 것인가, 아니면 수입 의존도를 낮추지 못한 채 새로운 에너지 종속 구조에 편입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지금 우리가 어떤 전략을 세우고, 어떤 투자를 결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