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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대란] HBM 독주의 역습…'AI 칩' 쟁탈전에 스마트폰·전기차 가격 줄인상 초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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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대란] HBM 독주의 역습…'AI 칩' 쟁탈전에 스마트폰·전기차 가격 줄인상 초읽기

텍사스인스트루먼트·인피니언 4월부터 전력 IC 최대 85% 올려…D램 현물가 1년 새 700% 육박, 소비자 물가 도미노 우려
HBM 쏠림에 일반 메모리 품귀…노트북 부품 원가 35% '메모리가 잡아먹어'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투자 경쟁이 반도체 공급망을 통째로 뒤흔들면서 전력 반도체부터 메모리까지 가격이 연쇄 폭등하고 있다. '반도체발(發) 인플레이션'이 가전·자동차·스마트폰 시장을 동시에 강타하는 양상이다. 이미지=제미나이3이미지 확대보기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투자 경쟁이 반도체 공급망을 통째로 뒤흔들면서 전력 반도체부터 메모리까지 가격이 연쇄 폭등하고 있다. '반도체발(發) 인플레이션'이 가전·자동차·스마트폰 시장을 동시에 강타하는 양상이다. 이미지=제미나이3
휴대폰 값이 왜 오르는지 의아했다면 답은 인공지능(AI) 서버실에 있다.

AI 데이터센터 투자 경쟁이 반도체 공급망을 통째로 뒤흔들면서 전력 반도체부터 메모리까지 가격이 연쇄 폭등하고 있다. '반도체발(發) 인플레이션'이 가전·자동차·스마트폰 시장을 동시에 강타하는 양상이다.

4월 1일, 아날로그 반도체 두 거인이 함께 가격표를 바꾼다


세계 최대 아날로그 반도체 기업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와 전력 반도체 선두 주자 독일 인피니언은 오는 4월 1일을 기해 제품 가격을 일제히 올린다. 두 회사가 같은 날 가격을 인상하는 것은 이례적으로, 전력 반도체 수급 위기의 심각성을 방증한다.

중국 IT 전문매체 이지웨이(ijiwei)와 EE 타임스 차이나에 따르면, TI는 직접 고객과 유통 채널 전체에 새 가격 체계를 적용하며 인상폭은 제품군별로 15~85%에 이른다. 핵심 타깃은 AI 서버와 전기차의 심장부인 전력관리 IC(PMIC)와 디지털 아이솔레이터다. TI는 이미 지난해 8월 중국 시장을 중심으로 6만 개 이상 품목을 10~30% 올린 바 있어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역대 최대 폭의 추가 인상을 단행하는 셈이다.

인피니언은 주력 전원 스위치 및 관련 IC를 5~15% 올리고 고사양 제품은 추가 조정을 예고했다. 인피니언 측은 블룸버그에 "대규모 AI 데이터센터 구축으로 전력 반도체의 구조적 부족이 고착화됐다"면서 "원자재와 에너지 비용 상승분을 내부 효율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임계점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TI와 인피니언이 동반 인상에 나선 것은 단순한 비용 전가 이상의 의미"라면서 "AI 수요가 전력 반도체 공급망을 구조적으로 재편하고 있음을 공식 선언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HBM이 일반 메모리를 잡아먹고 있다"…D램 현물가 700% 육박


메모리 시장 충격은 더 직접적이다. 블룸버그 집계에 따르면 일부 D램 현물 가격은 지난 1년 새 700%에 육박하는 급등세를 보였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등 메모리 3사가 수익성이 월등한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에 역량을 집중하면서 스마트폰·PC용 범용 D램 공급이 급격히 줄어든 결과다.

HBM 쏠림 현상은 수치로 확인된다. 트렌드포스 분석을 보면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의 매출에서 엔비디아·구글·아마존 등 AI 관련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2년 약 9%에서 현재 20%를 웃도는 수준으로 커졌다. 반면 일반 가전·IT 기기 제조사들은 공급 우선순위에서 밀려 가격 상승과 물량 부족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IDC는 현 메모리 수급 불균형을 "전례 없는 위기"로 규정했다. 아마존·구글(알파벳)·마이크로소프트·메타 등 빅테크가 올해 AI 인프라에만 6500억 달러(약 953조 원)를 쏟아붓기로 했는데, 이는 지난해 대비 80% 늘어난 규모다. 고용량 HBM을 선점하기 위한 쟁탈전이 범용 메모리 시장을 사실상 고사(枯死)시키고 있다는 분석이다.

국내 반도체 업계 전문가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입장에선 HBM이 수익성이 훨씬 높아 이 구조를 바꿀 유인이 없다"면서 "범용 D램 부족은 최소 2027년까지 지속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노트북 원가의 35%가 메모리…스마트폰·전기차로 불똥


반도체 가격 급등은 완제품 시장에 빠르게 전이되고 있다. 세계 3대 PC 제조사 HP는 노트북 제조 원가에서 메모리 비중이 한 분기 만에 15~18%에서 35%로 두 배 이상 뛰었다고 공시했다. 델(Dell)도 지난 1월부터 PC 가격 인상에 나섰다.

스마트폰 시장은 더욱 타격이 크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메모리 가격 상승으로 스마트폰 제조 원가가 향후 몇 분기 안에 15% 이상 오를 것으로 전망했다. 이에 따라 제조사들은 메모리 용량을 줄이거나 수익성이 낮은 보급형 모델 생산 자체를 포기하는 추세다. IDC는 올해 글로벌 스마트폰 출하량이 전년 대비 12.9% 줄어 역대 최대 감소 폭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다.

전기차도 예외가 아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메모리 수급 악화에 따른 수익성 저하를 우려하며 자체 메모리 칩 생산 가능성을 검토하겠다고 언급했다. 소니·닌텐도 등 게임기 업체들도 핵심 부품 수급난이 신제품 출시 일정과 가격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공식 경고했다.

AI 스타트업의 '2500달러짜리 96GB GPU' 꿈…현실의 벽은 높다


반도체 공급부족의 여파는 중소 AI 기업에도 집중된다. AI 스타트업 타이니코프(TinyCorp)는 최근 AMD에 96GB VRAM을 탑재한 차세대 그래픽처리장치(GPU)를 2500달러(약 366만 원) 선에 개발해 달라고 요구하며 1150만 달러 규모의 투자 유치에 나섰다. 그러나 현재 시장에서 96GB 용량을 갖춘 제품은 엔비디아의 'RTX PRO 6000' 시리즈가 유일하며, 대당 가격은 8000~1만 달러(약 1170만~1460만 원)에 이른다. 범용 D램 공급조차 제약받는 상황에서 저가형 고용량 GPU 출시는 업계에서 현실성이 낮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한국 반도체 수출엔 기회이자 위기…수혜와 역풍 동시에


이번 반도체 가격 파동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에는 양면의 날과 같다. HBM 시장에서 압도적 점유율을 확보한 두 회사는 단기적으로 수익 극대화 국면을 맞고 있다. 실제로 SK하이닉스는 올 1분기 HBM 매출이 전체 매출의 절반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국내 중소 전자부품 업체들은 아날로그 반도체 가격 급등으로 원가 압박에 직면해 있다. TI·인피니언 제품을 조달해 세트 제품을 만드는 중견 업체들은 인상분을 납품 단가에 전가하기 어려운 구조여서 수익성 악화가 불가피하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AI가 세계 반도체 공급망의 '블랙홀'이 된 지금, 삼성·SK하이닉스의 HBM 독주와 TI·인피니언의 동반 인상은 당분간 전 세계 전자산업의 수익 구조를 근본부터 뒤흔드는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소비자가 내는 스마트폰·노트북·전기차 가격표에 AI 서버의 청구서가 함께 포함되는 시대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