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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방산 기업, 증시 새 주역으로…라인메탈 수주잔고만 124조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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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방산 기업, 증시 새 주역으로…라인메탈 수주잔고만 124조 원

5년 새 3배 폭등한 방산 지수…TKMS·헬싱·OHB 상장 대기 행렬
"전쟁 특수 아닌 산업 구조 변화"…드론·잠수함·위성 '방산 트리오' 주목
독일 최대 방산업체 라인메탈사가 선보인 푹스 에볼루션(Fuchs Evolution) 장갑차 기반의 전투 정찰 차량. 라인메탈은 1분기 매출 19억 4000만 유로를 기록하며 730억 유로에 달하는 수주잔고를 바탕으로 투자자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사진=하르트푼크트이미지 확대보기
독일 최대 방산업체 라인메탈사가 선보인 푹스 에볼루션(Fuchs Evolution) 장갑차 기반의 전투 정찰 차량. 라인메탈은 1분기 매출 19억 4000만 유로를 기록하며 730억 유로에 달하는 수주잔고를 바탕으로 투자자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사진=하르트푼크트

유럽 자본시장이 냉전 종식 이후 가장 거대한 군비 재편 국면을 맞아 사실상 '방산 투자 시장'으로 재편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재집권 이후 증폭된 유럽 안보 불안이 무기·탄약·잠수함·드론·위성 기업을 증시와 투자 시장의 핵심 주역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5일(현지 시각) 독일 유력 경제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은 "유럽 재무장 흐름 속에 방산 기업들이 자본시장의 새로운 주역이 되고 있다"며 투자은행 훌리한 로키(Houlihan Lokey) 통계를 인용해 2025년 1월부터 올해 4월 초까지 유럽 방산 기업이 연루된 인수·합병(M&A)이 133건에 달했다고 보도했다. 같은 기간 유럽 방산 스타트업의 벤처캐피털 조달액은 74억 유로(약 12조 5900억 원)로 전년 대비 50% 이상 급증했으며, 2025년 한 해에만 200개 이상의 투자사가 이 분야에 신규 진입했다.

라인메탈, 예상치 못 미쳤는데도 주가 4% 급등…이유는 '124조 수주잔고'


독일 최대 방산업체 라인메탈(Rheinmetall)은 올해 1분기 매출이 전년 대비 7.7% 증가한 19억 4000만 유로(약 3조 3000억 원)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시장 예상치 23억 유로(약 3조 9000억 원)에는 못 미치는 수치였으나, 라인메탈 측은 "납품 타이밍 효과에 기인한 것"이라며 속도를 높이겠다고 약속했다. 투자자들은 이 해명을 즉각 수용했다. 발표 직후 라인메탈 주가는 4% 이상 급등하며 독일 DAX 지수 상승을 주도했다.
시장이 단기 실적 부진보다 미래에 베팅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는 수주잔고 때문이다. 현재 라인메탈이 쌓아둔 수주잔고는 730억 유로(약 124조 원)에 달한다. 라트함앤왓킨스(Latham & Watkins) 법무법인의 자본시장 파트너 올리버 세일러(Oliver Seiler)는 FAZ에 "외국인 투자자는 물론 독일 국내 투자자들도 독일 방산 기업 상장에 지속적으로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그는 "투자자들의 시각이 더 정밀해졌으며, 이제는 기업의 실질적 내용(Substanz)을 보려 한다"고 덧붙였다.

TKMS·CSG·OHB…상장 러시로 방산 증시 생태계 형성


최근 유럽 증시에서는 방산 기업 상장이 잇따르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증시는 지난 가을 이후 세 개의 신규 방산 기업을 맞이했다. 킬(Kiel) 소재 잠수함 건조업체 티센크루프 마린 시스템즈(TKMS), 잠수함용 돛대·전자기기 전문업체 가블러(Gabler), 군용 전자·정밀기계·소프트웨어 기업 빈코리온(Vincorion)이 차례로 상장했다. 암스테르담 증시에서는 체코 대·소구경 탄약 및 중장비 차량 제조업체 CSG가 올해 1월 38억 유로(약 6조 4600억 원)를 조달하며 시가총액 250억 유로(약 42조 5000억 원)로 거래를 시작했다. 이는 발행 규모와 시가총액 모두 유럽 방산 역사상 최대급 기업공개(IPO) 사례로 기록됐다. 체코 소화기·탄약 전문기업 콜트 CZ 그룹(Colt CZ Group) 역시 프라하 주식시장에 더해 암스테르담에 이중 상장을 추가했다.

다음 대형 상장 후보로는 독일 우주기업 OHB가 지목된다. FAZ에 따르면 사모펀드 KKR의 소수 지분 참여 2년 만에 OHB는 신주 발행을 통한 증자와 기존 주식 매각을 결합한 방식으로 전면 재상장을 준비 중이다. 자문기관으로는 투자은행 로스차일드(Rothschild)와 KKR 자본시장 부문이 총괄 역할을 맡고, 도이체방크·JP모건·골드만삭스가 글로벌 코디네이터로 참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OHB는 라인메탈과 함께 독일 연방군 군사위성 네트워크 구축 사업 수주에 공동으로 나서고 있으며, 독일 연방카르텔청(Bundeskartellamt)은 지난 4월 이 합작법인 설립을 승인했다.

헬싱 기업가치 20조 원…"유럽판 록히드마틴 나오나"


방산 스타트업 생태계도 들끓고 있다. 정찰드론 전문 기업으로 출발한 퀀텀 시스템(Quantum Systems)은 공동창업자 플로리안 자이벨(Florian Seibel)이 독일군의 공격용 드론 수요를 포착해 별도 법인 스타크 디펜스(Stark Defence)를 추가 설립했다. 두 회사의 합산 기업가치는 40억 유로(약 6조 8000억 원)를 넘어섰으며, 금융권에서는 IPO 가능성을 타진 중이다. 다만 상장 전 추가 자금 조달 라운드가 먼저 이뤄지거나 두 법인 합병 후 공동 상장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투자자 명단에는 미국의 논쟁적 기술 투자자 피터 틸(Peter Thiel)도 소수 지분으로 포함돼 있다.
가장 주목받는 방산 스타트업은 AI 기반 군사 기술 기업 헬싱(Helsing)이다. 헬싱은 독일군에 약 5억 유로(약 8500억 원) 규모의 자폭드론 공급 계약을 체결했으며, 기업가치는 120억 유로(약 20조 원)로 유럽 최고 수준의 방산 스타트업 지위를 굳혔다.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스포티파이(Spotify) 창업자 다니엘 에크(Daniel Ek)를 포함해 유럽 투자자들을 중심으로 자금을 조달해왔다는 점도 주목된다. 금융권의 화두는 이 수많은 방산 스타트업 가운데 어느 기업이 틈새 업체를 넘어 폭넓은 제품군을 갖춘 '네오프라임(Neoprime)', 즉 유럽의 록히드마틴급 대형 종합 방산업체로 성장할 것인가다.

세일러 파트너는 "현재는 기업가치가 너무 높아 M&A 시장이 활성화되기 어려운 면도 있다"고 진단하면서도 "독일에는 여전히 투자자들이 높이 평가하는 탁월한 엔지니어링·개발 역량이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과거 ESG 투자 흐름 아래 기피 대상에 가까웠던 방산 분야가 이제는 '국가 생존 산업'으로 재정의되며 유럽 증시의 핵심 성장 섹터로 올라선 것이다. 러시아의 위협과 미국의 안보 공약 불확실성이 동시에 작용하는 유럽에서, 방산 투자 열풍은 단기 전쟁 특수가 아닌 구조적 산업 재편의 신호탄으로 읽히고 있다.


노정용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noja@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