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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 100달러 시대... "미·이란 휴전 합의 뒤에도 공급 위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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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 100달러 시대... "미·이란 휴전 합의 뒤에도 공급 위기는 계속된다"

미·이란 평화협상 급물살에도 글로벌 원유 재고 8년 만에 최저치 추락 중
골드만삭스 "5월 말 재고 98일치로 추락"…여름 수요 폭발 앞두고 에너지 안보 비상
호르무즈 해협. 사진=연합뉴스. 이미지 확대보기
호르무즈 해협. 사진=연합뉴스.


미국과 이란 간 평화협상이 진전되면서 국제 유가가 급락했지만, 전 세계 에너지 시장은 협정 타결 이후에도 최소 수개월 이상 극심한 공급 부족에 시달릴 것이라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풀리더라도 중동산 원유가 전 세계 정유소에 도달하기까지 수십 일이 걸리는 데다, 이미 바닥을 드러낸 전략 비축유와 상업 재고만으로는 여름철 수요 폭증을 버텨내기 어렵다는 분석이 에너지 업계와 금융권에서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6일(현지시각) 주요 에너지 기업 최고경영자(CEO)와 투자은행, 시장 분석가들의 발언을 종합해 "설령 5월 중 휴전 합의가 이뤄진다 해도 세계는 극도로 낮아진 재고를 떠안은 채 여름을 맞이하게 된다"고 보도했다.
NBC뉴스는 같은 날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WTI)가 7% 하락한 배럴당 95.08달러(약 13만 7723원), 국제 기준 브렌트유가 7.8% 내린 101.27달러(약 14만 6689원)로 마감했다고 전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브렌트유는 올해 1월 초 배럴당 61달러(약 8만 8358원)에서 출발했으며, 6일 종가는 연초 대비 66% 오른 수준이다.

협상 진전에 유가 급락, 그러나 물리적 공급 복구까지 '깊은 시차'


미국과 이란은 현재 전쟁을 종결하고 핵 협상의 틀을 마련하기 위한 1페이지짜리 양해각서(MOU) 작성에 나선 상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협상에 큰 진전이 있다"고 밝혔고, 이란 측도 파키스탄을 중개 채널로 활용해 새 제안서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소식에 브렌트유 선물은 장중 한때 배럴당 99.80달러(약 14만 4560원)까지 밀리며 4월 22일 이후 처음으로 100달러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뉴욕포스트 인터뷰에서 "합의 서명은 아직 이르다"고 말하면서 유가는 낙폭을 일부 회복했다. 실제로 미 해군의 해협 통제 작전 이후 상업 선박 두 척만이 미군 경호 하에 겨우 빠져나왔을 뿐, 약 2만 3000명의 선원이 승선한 선박들이 여전히 페르시아만에 발이 묶인 상태다.

에쿼노르(Equinor)의 안데르스 오페달 CEO는 6일 실적 발표에서 "중동에 평화가 찾아온다 해도 시장이 정상화하려면 최소 6개월은 걸릴 것"이라고 밝혔다.

엑슨모빌(ExxonMobil)의 대런 우즈 CEO는 "호르무즈 해협이 다시 열리더라도 석유 흐름이 정상화하기까지 1∼2개월이 더 필요하다"고 밝혔다. 중동에서 유럽 연합(EU)까지 선박 운송에 평균 30일, 미국까지는 40일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역내 정유 시설 약 200만 배럴/일(bpd) 규모가 전쟁 피해로 멈춰 선 상태여서 공급 회복 속도를 더욱 늦추고 있다.

재고 8년 최저, 제트유 부족 초읽기…여름 수요 충격 앞두고 '이중 위기'


골드만삭스는 5월 4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전 세계 원유 재고가 현재 수요 기준 101일치에서 5월 말에는 98일치까지 내려앉을 것으로 전망했다.

아울러 정제유 재고는 전쟁 발발 이전 50일치에서 현재 45일치로 급감했으며, 일부 지역과 특정 제품에서는 공급 부족 위험이 '심각한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골드만삭스는 호르무즈 해협 공급이 조기에 회복된다 해도 원유 재고가 2018년 이후 8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까지 추락할 것으로 내다봤다.

모건스탠리는 미국 가솔린 재고가 올여름 말에 1억 9800만 배럴까지 쪼그라들 것으로 예측했다. 이는 자사 집계 기준 사상 최저치로, 2022년의 저점인 2억 1560만 배럴도 밑도는 수준이다. 실제로 미국 가솔린 재고는 5월 1일 기준 2억 2000만 배럴에도 못 미쳐 2014년 이후 같은 시기 최저치를 기록 중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중동 공급이 온전히 복구되지 않으면 유럽에서 이르면 오는 6월부터 제트 연료 부족이 현실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아일랜드는 현재 제트유 재고가 10일치에 불과한 상황이며, 영국·노르웨이·포르투갈은 제트유 전략 비축분 자체가 없다.

아시아 원유 수입량은 4월 기준 1년 전 대비 30% 감소해 2015년 이후 최저치로 떨어졌다.

호주는 6일(현지시각) 연방 예산에 연료·비료 안보 패키지로 호주 달러 100억 달러(미국 달러 기준 약 72억 2000만 달러, 약 10조 4580억 원)를 편성한다고 발표했다.

앤서니 앨버니지 총리는 "현재 비축 기준 30일에서 50일로 끌어올리고 약 10억 리터 규모의 정부 직속 비축유를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호주는 연료 소비량의 약 80%를 수입에 의존하며 이번 사태로 국지적 연료 부족을 경험한 바 있다.

라이스타드에너지(Rystad Energy)의 클라우디오 갈림베르티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5월 말부터 해운이 정상화한다고 가정해도 전 세계는 12억∼20억 배럴의 공급 손실을 입게 되며, 이는 전쟁 이전 전 세계 재고의 16∼27%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카타르 액화천연가스(LNG) 시설 피해로 발생한 LNG 공급 손실도 연간 전 세계 공급량의 7∼11%인 3000만∼5000만t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중동 의존도 70% 한국, 에너지 비용 급증과 식량 안보 위기 동시 직면


한국은 석유 수입의 70%를 중동에 의존하는 구조여서 이번 사태의 파고가 유독 가파르다. 호르무즈 봉쇄 이후 국내기업들은 우회 항로인 홍해 경로로 원유 수송선을 돌리고 있으나 운송 기간 연장과 물류비 상승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에너지 업계에서는 브렌트유가 배럴당 20달러 오를 때마다 한국의 연간 에너지 수입 비용이 약 100억 달러(약 14조 4850억 원) 늘어나는 것으로 추산한다. 연초 배럴당 61달러에서 6일 종가 101.27달러로 약 40달러 급등한 현 상황이 연말까지 이어질 경우 한국의 추가 에너지 비용 부담은 200억 달러(약 28조 원) 안팎에 이를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현대제철은 최근 실적 설명회에서 호르무즈 봉쇄로 물류비가 크게 늘었다고 언급하며 근거리 물류 중심으로 전략을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공급 위기는 비료 분야로도 번지고 있다. 세계 비료 공급의 3분의 1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며, 질소계 비료의 핵심 원료인 천연가스 공급도 카타르 가스전 피해로 크게 줄었다.

아시아 각국의 파종 시기가 겹치는 가운데 비료 수급이 차질을 빚으면서 식량 안보 우려까지 연쇄 확산하고 있다. 글로브앤드메일은 최근 보도에서 베트남의 비료 수입이 50% 넘게 줄었다고 전하며 동남아시아 쌀 공급 불안을 경고했다.

에코노믹스헬프는 "이미 싱가포르에서 배럴당 210달러(약 30만 4185원), 스리랑카에서 286달러(약 38만 8198원)에 현물 거래가 이뤄졌다"면서 "선물 시장은 3월 1일 이후 두 달간 줄곧 빠른 해소를 가격에 반영해 왔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로이터통신이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분석가들은 올해 브렌트유 평균 가격을 배럴당 86.38달러(약 12만 5120원)로 전망했다. 이는 1월 예측치인 배럴당 62달러(약 8만 9807원)에서 크게 올라선 수치다.

EIA는 이번 분기 브렌트유가 배럴당 95달러 이상을 유지하다가 3분기부터 80달러 아래로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으나, 협상이 이뤄지더라도 물리적 원유 가격이 전쟁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시장 안팎의 공통된 시각이다.

평화협상 소식에 유가가 출렁이더라도 물리적 공급 복구는 별개의 시간표를 따른다. 비축분이 바닥을 드러낸 채 여름 최성수기를 맞이해야 하는 세계 에너지 시장은, 합의 서명 여부와 무관하게 당분간 높은 유가와 제품 부족이라는 이중 압박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진형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