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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호 서양화가의 미술 에세이 ④ 홍 작가의 부고, 차가운 캔버스 앞에서 뜨거운 피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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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호 서양화가의 미술 에세이 ④ 홍 작가의 부고, 차가운 캔버스 앞에서 뜨거운 피를 묻다

한명호작 '소리를 보다', Oil on canvas, 2026이미지 확대보기
한명호작 '소리를 보다', Oil on canvas, 2026
강화도 레지던시에서 홍 작가를 처음 만난 것은 꽤 오래전의 일입니다. 사적인 자리보다는 주로 실무 단체 회의에서 그를 마주하곤 했습니다. 그는 나보다 선배였고, 체구가 우람했으며, 무엇보다 피가 뜨거운 다혈질이었습니다.

한쪽 다리에 소아마비의 흔적을 훈장처럼 안고 있었지만, 그는 세상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자신의 몫을 씩씩하게 베어내는 사내였습니다.

나 역시 여덟 살 무렵까지 걸음마가 온전치 못했습니다. 훗날 돌이켜보면 그것이 소아마비였는지, 혈관 장애로 인한 지독한 좌골신경통이나 미약한 중풍이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겉보기에 멀쩡한 어른으로 자라난 나에게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오랜 비밀이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그의 툭 불거진 불편함에서 묘한 연민을 읽었고, 가슴 한구석으로 그에게 조금이라도 더 마음을 내어주고 싶었던 기억이 납니다.

다혈질이란 무엇일까요. 남보다 기운이 세고 불의를 참지 못한다는 뜻일 터입니다. 피가 뜨거워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다 끝내 뇌졸중이나 심장마비로 허무하게 스러지는 이들이 우리 곁엔 참 많습니다. 고흐가 그러했듯, 화가란 본디 피가 뜨거운 족속일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뇌는 크게 두 가지 기질로 나뉩니다. 차가운 이성(IQ)으로 세상을 통제하는 자와, 뜨거운 감성(EQ)으로 폭발하는 자. 지능이 앞서는 이는 입을 열기 전 차분히 머릿속을 계산하지만, 감성이 앞서는 이는 가슴의 불덩이를 참지 못해 급하게 속내를 쏟아냅니다. 홍 작가와 나는 명백히 후자에 속했습니다. 성급하리만치 솔직하게 의견을 내던졌고, 때로는 몸을 사리며 뒤로 숨는 소극적인 이들을 향해 매서운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림을 대하는 태도 역시 이 기질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치밀하게 계획하여 그리는 자가 있고, 즉흥적인 감각에 온몸을 내맡기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미술 교육은 언제부터인가 작가들의 이 날것 같은 기질을 거세하고 획일화시킵니다. 데생을 할 때조차 대상의 본질을 파고드는 감각이나 거친 터치보다, 그저 껍데기를 사진처럼 베껴낸 솜씨만을 칭송합니다. 이는 화가로부터 형태를 과감히 파괴하고 내면을 쏟아내는 표현주의적 열망을 빼앗고, 사물의 얄팍한 외형적 상징에만 집착하게 만듭니다.

한명호의 '인물', ink  on  paper, 2026이미지 확대보기
한명호의 '인물', ink on paper, 2026
한명호작 '소리를 보다', Oil on canvas, 2026이미지 확대보기
한명호작 '소리를 보다', Oil on canvas, 2026

오늘날 소셜 미디어를 떠도는 수많은 그림을 봅니다. 형태를 비트는 얄팍한 조형 실험이거나, 선과 색의 적당한 타협으로 빚어낸 껍데기뿐인 추상표현주의가 대부분입니다. 사물의 겉모습을 베끼는 응물상형(應物象形)보다 붓끝의 기운생동(氣韻生動)을 으뜸으로 여겼던 우리의 훌륭한 옛 가치관을 굳이 빌려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작가가 사물의 본질에 다가서려 피 흘린 그 처절한 노력에만 진짜 공감할 수 있습니다.

크기를 무기 삼은 제프 쿤스의 조형물, 까닭 없이 덩치만 키운 안젤름 키퍼의 화면, 충격과 자극으로 대중의 말초신경을 찌르는 데미안 허스트. 이 소란스러운 거인들의 틈바구니에서, 얌전한 화가들은 잭슨 폴록이나 빌렘 데쿠닝, 마크 로스코가 남긴 추상표현주의의 잔해에 도취해 비슷비슷한 장식품들을 찍어냅니다.

물론 선과 색면의 그 적당한 하모니가 거실 벽에 걸어두기엔 훌륭할지 모르나, 어느 순간부터 우리 미술사에는 고흐의 눈물도, 프란시스 베이컨의 비명도 보이지 않습니다.

머리로 계산된 차가운 조형물과 억지로 포장된 브랜드 상품들. 나는 이제 그런 것들에 넌더리가 납니다. 선비들이 작은 화선지 위에 자신의 개성과 우주를 오롯이 담아내던 문인화처럼, 차가운 머리가 아닌 뜨거운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진짜 그림이 사무치게 보고 싶습니다. 세련되고 이지적인 감각으로 덩치만 부풀린 거대한 캔버스보다, 작지만 응축된 에너지가 시퍼렇게 꿈틀대는 화면과 마주하고 싶습니다.

아니, 세상에 그런 그림이 없다면 이제 내가 그려야겠습니다.

차가운 이성의 작가들은 거대한 규모와 충격을 정교하게 설계하고, 뜨거운 감성의 작가들은 때로 주체할 수 없는 과잉으로 흘러넘치곤 합니다. 그러나 이중섭이 버려진 담배 은박지 위에 긁어낸 은지화를 보십시오. 거기엔 그 어떤 물감의 과잉도 없는, 뼛속까지 솔직하고도 눈물겨운 절제의 미학이 숨 쉬고 있습니다.

IQ가 높은 이성적 작가들은 흠잡을 데 없는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그들의 의도는 투명하거나, 반대로 극도로 애매모호합니다. 애매모호함을 현대미술의 미덕이라 착각하는 얄팍한 평단은 이를 기꺼이 환호합니다. 그들은 유사한 패턴의 그림을 평생 안전하게 복제해 내거나, 영악한 사회적 관계망을 통해 작가의 지위를 굳건히 다지는 데 주력합니다.

그러나 EQ가 높은 감성적 작가들은 다릅니다. 그들의 붓질은 종종 처음에 품었던 의도와 전혀 다른 결과물에 당도합니다. 목적지로서의 완성된 결과보다, 붓이 캔버스를 스치는 찰나의 뜨거운 감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없이 실패하고 좌절합니다. 하지만 한 번 영감의 탄력이 붙으면 미친 듯이 다작을 쏟아내고, 한자리에 고여 있지 못해 끝없이 변전합니다. 그릴 것이 사라지면 미련 없이 붓을 꺾고 스스로 폐인이 되기를 자처하는, 지독하게 슬프고도 아름다운 영혼들.

홍 작가는 떠났고, 남겨진 나는 여전히 뜨거운 피를 앓으며 오늘 밤도 텅 빈 캔버스 앞에 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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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호(서양화가)

글쓴이/ 한명호(1957년생)/ 홍익대 서양화과 및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박영덕화랑. 박여숙화랑. 현대아트갤러리. 갤러리Q, 부산화랑 등 다수), 단체전 및 국제전(화랑미술제-현대화랑, 북경아트페어-아트사이드갤러리 등), 최우수예술가상 미술부문 수상(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저서 ‘보이지 않는 곳을 보는 화가’ 등 다수


한명호 서양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