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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 홍보•교육으로는 조직의 변화 뿌리 못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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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 홍보•교육으로는 조직의 변화 뿌리 못내린다

[우형록 교수의 변화를 넘어 미래로(11)] 새로운 지식 전파 이전에 폐기할 지식 관리하라

공감•이해보다 일방적 세뇌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고
효과 있어도 한때에 그쳐
과거에 학습한 지식과 경험
현재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
뭘 버려야 하는지 알려줘야

언제부터인가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마다 눈치를 보게 된다. 성격이 험악한 사람이 뒤에 서서 내가 자신의 갈 길을 막는다고 못마땅한 눈치를 주고 있는지 살핀다. “좀 지나갑시다!” 퉁명스러운 외마디와 함께 짜증 섞인 눈총을 받았던 불쾌한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따지면 최소한 2002년 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타인을 배려하는 시민의식의 일환으로 ‘한 줄서기 캠페인’이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왼쪽은 걸어갈 사람을 위해 비워 두고, 서서 갈 사람은 오른쪽을 이용하자는 것이다. 이는 곧 에스컬레이터 탑승 예절로 굳어졌다. 얼핏 급한 용무로 빨리 가야 할 사람들에게 길을 내주는 합리적인 해법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른쪽으로 타려는 사람들의 줄은 이전보다 길어지는 단점도 있다. 무엇보다 오른쪽으로 편중되는 무게 때문에 에스컬레이터가 자주 고장이 나고, 안전사고로 이어진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한국승강기안전관리원에 의하면 서울 지하철에서 에스컬레이터 사고는 2002년 16건이었으나 2006년에는 89건으로 5배 이상 증가했다.

급기야 2007년에 서울도시철도공사는 ‘두 줄서기 캠페인’을 추진하게 된다. ‘두 줄서기, 미안해하지 마세요’라는 홍보 포스터가 붙었고, 청소년으로 구성된 캠페인 도우미들이 손팻말을 들고 역사 곳곳에 배치됐다. 황당한 사실은 운영주체가 다른 지하철에서는 한 줄서기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당시 승객들은 5~8호선에서는 두 줄서기를, 1~4호선에서는 한 줄서기를 종용당한 것이다. 아무튼 2015년 국가안전처가 나서서 다시 폐지하기까지 약 8년 동안 ‘두 줄서기 캠페인’은 지속적이고 광범위하게 수행됐다.

캠페인의 저조한 성과가 국가안전처의 주요한 폐지 이유였다. 대대적인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한 줄서기로 먼저 습관이 형성된 사람들은 두 줄서기로 쉽게 행동을 전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국가안전처가 한 줄서기를 명백히 지지한 것도 아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걷거나 뛰지 말라는 안전수칙을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강권하던 원칙만 모호하게 없어졌다. 내 갈 길을 막았다고 짜증을 부리든, 아이들과 나란히 손잡고 두 줄로 서든, 구체적인 행동지침은 승객들 각자의 몫으로 어물쩍 남게 되었다. 어수선한 홍보와 야단스러운 소동 없이도 한 줄서기가 잘 정착되어 운영되는 영국, 러시아, 일본 등의 나라와 비교하면 참으로 민망하다.
우리는 변화의 방법으로 너무 쉽게 홍보와 교육을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 변화의 본질보다 ‘~캠페인’ ‘~운동’이란 용어를 붙여 일사천리의 동참을 이끌어 내길 바란다. 실질적 효과는 뒤로 물리고 홍보와 교육의 양에 집착한다. 추진하는 변화가 합당하고 좋아 보일수록 홍보와 교육은 주입식으로 운영된다. 공감, 이해, 설득보다 일방적인 세뇌가 홍보와 교육의 내용으로 자리잡는다. 심지어 홍보와 교육을 변화관리 자체와 동일시하는 곡해도 나타난다. 그러나 그 효능과 역할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모든 문제를 홍보와 교육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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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와 교육의 기본 전제에는 ‘몰라서 변하지 않는다’, ‘몰라서 안하고 있다’는 함의가 깔려 있다. 즉, 홍보와 교육은 무지(無知)가 원인일 때 가장 효과적이다. 그런데 홍보와 교육의 효과가 조직변화에서 기대 이하이거나 일시적인 경우가 많다. 변화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모른다기보다 아는 대로 실행이 힘든 것이다. 마치 건강을 위해 살을 빼야 한다는 정설은 대부분 알고 있지만, 실천이 힘든 것과 동일하다. 여기에 살을 빼야 한다고, 왜 빼지 않느냐고 강변하는 교육의 효과는 반복될수록 반감할 수밖에 없다. 기존의 식습관, 수면습관 등을 고려하지 않는 백지오류(clean slate fallacy)에 빠질 경우 더욱 그렇다.

백지오류는 학습 대상자가 새로운 지식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완전히 빈공백 상태(tabula rasa)라고 오인하는 것이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변화에 앞서 과거에 학습한 지식과 경험이 현재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여 새로운 학습의 속도와 수용 범위에 엄연히 영향을 미치는데, 이를 무시하는 오류이다. 변화 주도자는 단순히 ‘이 좋은 것을 왜 안하지?’라고 의문을 갖고 답답하겠지만, 변화가 뿌리내릴 토양은 훨씬 척박하다.

인간은 현상을 유지하면서 익숙한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기를 원한다. 백지라기보다 오히려 현재를 유지하려는 관성이 변화에 좋고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느 유명한 골프코치는 처음 시작하는 학생보다 유경험자에게 더 높은 강습비를 받는다고 한다. 이미 기초는 알고 있으니 유경험자의 강습비가 더 저렴해야 이치에 맞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잘못 배워 익숙해진 스윙습관을 고치는 것이 기초부터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힘들기 때문이다.

● 백지오류를 탈피하는 방법은?


'폐기학습'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적용

성공적 경험과 지식도 때로는 버려야


백지오류를 탈피하는 방안으로, 뉴스트롬(John W. Newstrom)은 폐기학습(unlearning)을 상황에 맞게 적용할 것을 제안했다. 일반적인 홍보와 교육이 새로운 것을 전파하는 목적이라면, 폐기학습은 이와 반대로 기존의 지식, 행동규범, 사고방식을 버리고 무효화한다. 최근까지 폐기학습은 광의의 학습의 일부분으로 간주됐다. 새로운 것을 제대로 학습하면 오래된 것은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사멸한다고 여겼다. 오늘날 변화를 저해하는 혼란, 갈등, 저항의 적극적인 해결책으로서 폐기학습의 역할이 중요하게 인식되면서 학습활동으로부터 독립적으로 분리하고 동등한 수준으로 다루고 있다. 조직변화의 관점에서 폐기학습은 레빈(Kurt Lewin)이 강조한 해빙(unfreezing)과 맥을 같이한다(6월 1일자 참조). 새로움을 선입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존의 학습된 지식과 경험을 녹이는 것이 폐기학습이다.

작금에 폐기학습의 대상은 진부화되거나 쓸모없어진 기존의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심지어 성공적인 경험과 지식도 폐기의 대상으로 강조된다. 소위 성공증후군(success syndrome), 성공의 역설(paradox of success)과 같은 개념으로 대동소이한 주장을 펼치는 학자들이 많다. 과거에 성공했던 경험을 현재와 미래에 반복적으로 적용하면 또 다시 성공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오히려 실패를 유발한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환경과 조건이 시간이 경과하면서 달라졌으므로 과거의 행위를 그대로 답습한다고 성공률이 제고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조직 내에서 승승장구하는 관리자들은 조직변화에서 가장 경계할 인물들이다. 현실안주의 관성이 성공경험과 거듭 맞물리면 관행을 양성한다. 관행은 잘잘못을 따지는 분석을 배척하고 올곧은 조언은 듣기 싫어하며 새로움에 주저하기 때문이다.

혁신적인 기업은 폐기학습을 전략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조직의 변화역량으로 발전시킨다. GE의 변화프로그램인 워크아웃 또한 가치없는 일(work)을 제거(out)하는 폐기학습이 핵심개념이다. 폐기학습은 정보 및 지식을 관리하는 실무적 관점에서 조직망각(organizational forgetting)의 일종으로 해석된다. 애즈미(Feza T. Azmi)는 폐기학습을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네 가지 유형의 망각으로 확장했다. 먼저, 소멸(decay)은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변하면서 부지불식간에 가치 없는 것들이 사장되는 현상이다. 소멸은 수동적이고 우연하게 망각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폐기학습과 구별된다. 폐기학습은 망각을 계획적이고 의도적으로 견인한다. ‘언젠가 필요하겠지’ ‘버리기는 아깝다’고 생각되는 대부분이 6개월 이상 사용되지 않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한다. 소멸에는 장시간이 소요되고 그 동안 물리적, 심리적인 공간을 차지하면서 비효율을 야기한다. 새로운 것을 도저히 놓을 공간이 없을 때가 되어서 버리는 것은 우둔한 선택이다.

또한 애즈미는 망각의 대상을 잘못 선정하는 오류를 고려하고 있다. 즉, 폐기학습과 소멸의 대상이 쓸모없거나 잘못된 것이지만, 자칫 유용하고 가치 있는 것이 폐기되거나 소멸되는 파기(sabotage)와 망실(negligence)이 발생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파기는 기존의 유용한 것을 의도적으로 제거하는, 폐기학습의 부정적인 결과이다. 조직 내 정치적인 행위에서 자주 나타난다. 전임자의 방식과 기술이 훌륭한 측면이 분명히 있음에도 신임자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위해 모조리 지우고 새로 시작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망실은 아직 쓸모있는 것을 우발적으로 잃어 버리는, 소멸의 부정적인 결과이다. 정보와 지식에 대한 유지관리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소멸의 예이다. 기업에서 담당자의 전환배치나 이직 등으로 관련 지식과 성과물이 모두 캐비닛에 묻혀버리는 일은 흔히 발생한다. 만약 캐비닛 속의 지식과 정보가 무용지물이라면 다행이지만, 가치있는 것이라면 망실이나 파기에 해당한다.

파기와 망실은 조직의 성장과 경쟁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소멸과 망실은 그 양과 심각성을 포착하기 힘들다. 폐기학습을 중심으로 네 가지 망각을 전략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조직변화의 성공적인 토대를 구축할 수 있다. 수영 실력이 더 이상 늘지 않아 의기소침했던 적이 있다. 동료들은 100m도 거뜬한데 나는 50m도 힘들어 했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물에 대한 공포와 숨을 쉬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들숨에만 몰두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날숨을 물 속에서 뱉지 않고 참았으니, 들숨이 충분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유래 없는 고속성장을 하면서 우리는 선진 기술과 지식을 재빨리 받아들이는 데 몰두했다. 이제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는 날숨을 쉬듯 기존의 것을 버리는 폐기학습을 전략적으로 구사할 때이다.
우형록 한양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