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에 한 권의 참된 문장이 있으되 옛 사람의 동강동강 끊어진 몇 마디로 땜질하듯 덮는구나.
<해설>
사람과 나무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군락을 이룬다는 데 있다. 함에도 나무의 군락은 각자 자랄만한 넉넉한 틈새를 두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 요즘은 그러한 여백이라 할 틈을 줄만 하지가 못하다. 그것은 인구의 밀집 같은 형태만이 아닌, 시간적 개념에 편승해 드러내는 표현도 그러하다. 한편 나무의 표현은 들어오는 입력을 조금도 왜곡하지 않는 직입(直入)이며, 그 흐름을 그대로 따르는 내어맡김이면서도 제 도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바람에 몸을 실린 나무의 표현이라 할 것에 무리가 있는가. 설혹 모진 눈바람 속에서라도 군말도 군더더기도 없다.
스마트폰의 ‘문자’라는 낱자가 가져 온 가장 큰 폐해는 무엇이든 생각해봄직의 그 여유로운 상상의 날개를 거둬버린 데 있을 것이다. 느낌을 물으면 모두가 단답형이다. 예스, 노 혹은 좋다, 아니다로. 문장이 거덜 난 세대에는 조금 긴 문장은 참기가 무척 어렵다. 그래서 누가 대신하여 조목조목 말로 설명해주거나, 조각조각 나눠서, 줄그어서 인용할 뿐이다.
저 눈보라 속에 서있는 한 그루 나무가 뿜어내는 에너지는 그 하나의 시종(始終)이 여일히 완결될 문장이라면, 그대는 어디 있는가? 생각이란 걸 해서 자기를 더 변화 발전시켜 보려면 키보드처럼 고랑이 선 분절의 낱자의 속도 속에서, 옛 풍류객이 마음속에서 이미 다 갈무리된 문장의 한 줄 시를 읊는 묘미를 알 길이 있겠는가? 그것은 바람처럼 수정이나 가필이 필요가 없는 직입이며 흐름이나, 사람의 ‘문자’적 군락은 서로를 북돋워 진정한 성장을 나누려 함이 아니요, 비슷하게 어찌 해보려는 사이비 여백을 둔 사군자 짝퉁일지도 모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