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람이 무슨 의사(意思), 무슨 근심이 있으며, 아예 어리석은 이가 무슨 지식에, 무얼 알려 할 것이오, 그러니 가히 더불어 학문을 논(論)할 만 하리오. / 아는 것은 많은데 지혜까지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아는 것이 번다하고, 억측과 시샘 또한 만만치 않으니, 일일이 함께하기 어려우리오.
<해설>
옛날에도 요즘처럼 스크랩이니 퍼가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한 자 한 자 밤새 가며 필사를 하고 음미하였지만 말이다. 비록 좋아서 할 지언 정, 그 낱자에 점 하나 획 하나 빠질 새라 조심하며 옮겨 적는 정성이란 건 그 저자에 대한 경외와 남의 것이라도 스스로 체득하려는 간절함이 더해 있기 마련이니, 두고두고 다시 읽힐 것이었다. 반면 요즘은 한 번 클릭의 우연성에 따른바 ‘괜찮아’ 보여, 클릭 한 번 더로, 제 집에 들여와도 제대로 된 음미 같은 건 처음부터 어려운 구조라 할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제 돈 주고 책을 사서 읽는 것 쯤은 해야 하지 않나 싶다. 눈으로 휙 한 번 스칠 것이 아니오, 들인 돈이 아까워서라도 일독쯤은 할 법하니. 허나 그런 한편은 그렇게 들인 돈이 아까운 경우도 많긴 하지만 말이다.
논(論)이란 게 무엇인가. 누가 ‘한’ 말(言)의 수레바퀴(侖) ‘자국’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 바퀴가 무엇에 달린 것이진 알 길도 없고, 정말로 제대로 된 참값인지도 알 수도 없으면서, 단지 세월 묵혀 남겨진 것이라는 요지부동의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과 같다. 그야말로 웬만해서 그것의 위작 여부를 가릴 수 있겠는가. 한문서적들을 조금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이 익히 들어봤을 이름짜한 저자들도 그 이전 혹은 동 세대 다른 사람들의 저작을 그대로 베끼거나, 모방한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보게 된다. 처음부터 문장을 잘 하는 사람은 없는 고로, 일종의 수학(修學) 과정이라 본다. 헌데도 요즘 사람들에게 그 사람의 이름값에 묻혀, 그리고 옛 서적이라는 단지 그 명분만으로 뭉뚱그린 ‘논거’가 되는 것도 현실이다.
논의 근거란 무엇인가. 첫째로 오리지널 창작이어야 하며, 둘째로 그 저자의 생각이 올바른 몸체에 똑바른 바퀴라는 누가 봐도 ‘참값’이라는 전제가 있어야만 한다. 단지 앞선 세대의 것이라 ‘무조건 옳다’는 퍼가기는 정말이지 위험천만 오류의 재생산이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사람의 안목이라는 것이 중요해진다. 무엇보다 이미 묶인 ‘책’이라는 것에 혹하지 않는 철저한 분별의 눈이. 그리고 근거한 그 정보를 바탕으로 쓸 또 다른 저작이 다음 세대에 반복됐을 때 과연 ‘그래도 옳았다’는 방점을 받을 수 있을지 또 조심하고 조신할 일인 것이다.
그래서 섣부른 지식이 무섭다. 더군다나 누군가의 선생이면서 도무지 ‘모른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고 보면 모르는 것도 적당히 얼버무리게 되기 쉬우며, 배우는 쪽은 자신이 정작 뭘 모르는지조차 가늠할 길이 없으니, 가르치기도 배우기도 정말이지 어려운 세상을 살고 있다. 시대는 이제 정보의 홍수 속이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정보란 것이 사람의 손이 아니라, 그것을 배열하는 기계에게 맡겨져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참값이어야 할 정보 검색의 길눈은 누구라도 어두운 시대이기도 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