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귀하다고 거들먹이는 자는 없어 업신여겨지는 이보다 염량 곧 이익이 있을 때라야만 움직이고 그에 반하는 것에는 가차 없기로야 도리어 도가 지나치고, 강샘하는 마음이란 살붙이가 남보다 더더욱 비비꼬이니, 이러한 가운데 뱃속 심지로써 속수무책 당하지 않고 스스로 평정치 않는다면, 날로 번뇌 욱죈 자리에서 선명할 수 있으리오.
<해설>
뉴스는 현대의 매체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휘발성 소비재다. 문자화 되고 공기와 접촉하는 즉시 사라진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의 부와 귀의 속성에 가장 잘 맞먹는다. 이익에 있을 때라야만 거동하는 광속 스피드와 함께 그에 반하면 가차 없기로야 그 무엇도 당할 재간이 없는 염량 그자체이기도 하다. 아니 세상에 형체로써 있다는 것이 이미 염량일 수 있다. 목에 붙은 숨은 무한히 쉬어도 되는 공짜(?)라면, 식도로 내려가는 것은 값으로 환산할 단위들인 까닭이다. 목이 기도와 식도로 구성된다는 건 놀라운 신비가 아닌가. 공기처럼 겁 없이 들이켜고 내쉬어도 되는 마음과 여전히 죽을 때까지라도 지불해야만 살게 되어있는 구조로 말이다. 그러므로 몸이 있음으로 벌써 염량은 숙명이다. 하니 그 이면 바로 나에게 해당될지도 모를 ‘가차 없이 내버려짐’에도 기어코 항변의 소지는 있는가. 값은 어쩔 수 없이 유형을 더 추구하게 되어 있다. 보이는 모든 것에 값어치를 매기는 수순에서 그것이 몸이라 한들 무슨 대수이겠는가. 그러니 시선 두는 곳마다 도배된 몸의 내외부 수선 광고가 필수덕목인 것도 일변 수긍 아니 될 바도 아니다. 그렇게라도 값이 되는 싶은 것은 그저의 생존을 넘어선 돌출되어 상승하려는 본래적 욕망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 값이 동시에 과연 가치인가는 이젠 거의 별개의 사안이 되어버렸다.
숨 쉬며 세상에 온 나는 공짜다. 허나 먹어야 사는 삶은 살아있는 부가가치를 줄기차게 요구받는 도전이며 응전이다. 바로 그래서 죽도록 몸에 기거해야만 하는 나는 시시각각 공중분해 되는 휘발성의 소비재로써 있다? 없다? 여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