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으로 써 몸 바룸은 경솔해선 아니 되니 쉽사리 움직인 즉 바깥 만물이 나를 휘둘러 한가로이 잦아들 짬이 없고, 뜻을 가다듬음은 무겁기만 해서도 아니 되니 지나치게 신중하면 안에 둔 사물에 얽매여 시원스럽게 생동할 추진력이 없다.
<해설>
첨단 문명이라 할 것들은 실시간과 실사(實事)를 추구한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피아노란 구조와 흡사한 데가 있다. 그 하얗고 검음을 분별하며, ‘도’라는 건반을 쳤을 때 그에 맞대응하며 정확히 조율된 ‘도’음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의 건반은 결코 하나의 음 이상이지 않다. 그것이 건반악기가 도래한 곳이 서양이 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분명한 성음으로 귀에 들리며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지만, 고전음악이 가장 작곡자의 원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라면, 그 변주라 할 것들도 하나 하면 하나가 되는 증명성의 범주를 크게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교육되고 학습한 반복으로부터 유래한다. 물론 피아노도 현(絃)과 공명(共鳴)의 소리다. 그럼에도 그 음률로써 드러내 보이는 희고 검은 건반은 선과 악의 또 다른 의태어 같다. 사람이 종교에 갇히면 일상의 모든 것이 종교적 어법에 준하는 것과 같은 현상인 것이다. 곧 바깥으로만 향하게 되어 있는 시야에 확보되어야만 이끌어내지는 반응이란 예를 들면 피겨 선수가 짜여 진 안무대로 해내는 연습 끝의 실연(實演)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단지 안무에 정확한 것과 그 안무를 넘어서 음악과 혼연일체의 감응이 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아사다 마오가 김연아를 결코 넘어설 수 없을 것은 김연아의 다양한 표정들이 이미 증명(?)한다. 웃는 것 이외에도 표정은 사람의 수효만큼이나 변화무쌍하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일생동안 피아노 한 옥타브만큼이라도 다양한 표정들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실제로 아주 드물다. 얼굴은 육장육부와 마음의 상태의 집결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의 대내외적 생명력의 분출 장(場)이기도 하다. 생명력이란 고작 저라는 한사람도 제 맘대로 하지 못할 그릇인가. 수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며 쥐락펴락할 것인가 하는 그 그릇의 차이짐의 분간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