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한시산책-채근담]반응과 감응, 사람을 움직이는 생명력

글로벌이코노믹

[한시산책-채근담]반응과 감응, 사람을 움직이는 생명력

士君子持身不可輕 輕則物能撓我 而無悠閒鎭定之趣, 用意不可重 重則我爲物泥 而無瀟洒活潑之機 - <菜根譚> 前集 106 / 洪自誠

사람으로 써 몸 바룸은 경솔해선 아니 되니 쉽사리 움직인 즉 바깥 만물이 나를 휘둘러 한가로이 잦아들 짬이 없고, 뜻을 가다듬음은 무겁기만 해서도 아니 되니 지나치게 신중하면 안에 둔 사물에 얽매여 시원스럽게 생동할 추진력이 없다.

<해설>

첨단 문명이라 할 것들은 실시간과 실사(實事)를 추구한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피아노란 구조와 흡사한 데가 있다. 그 하얗고 검음을 분별하며, ‘도’라는 건반을 쳤을 때 그에 맞대응하며 정확히 조율된 ‘도’음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의 건반은 결코 하나의 음 이상이지 않다. 그것이 건반악기가 도래한 곳이 서양이 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분명한 성음으로 귀에 들리며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지만, 고전음악이 가장 작곡자의 원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라면, 그 변주라 할 것들도 하나 하면 하나가 되는 증명성의 범주를 크게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교육되고 학습한 반복으로부터 유래한다. 물론 피아노도 현(絃)과 공명(共鳴)의 소리다. 그럼에도 그 음률로써 드러내 보이는 희고 검은 건반은 선과 악의 또 다른 의태어 같다. 사람이 종교에 갇히면 일상의 모든 것이 종교적 어법에 준하는 것과 같은 현상인 것이다. 곧 바깥으로만 향하게 되어 있는 시야에 확보되어야만 이끌어내지는 반응이란 예를 들면 피겨 선수가 짜여 진 안무대로 해내는 연습 끝의 실연(實演)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단지 안무에 정확한 것과 그 안무를 넘어서 음악과 혼연일체의 감응이 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아사다 마오가 김연아를 결코 넘어설 수 없을 것은 김연아의 다양한 표정들이 이미 증명(?)한다. 웃는 것 이외에도 표정은 사람의 수효만큼이나 변화무쌍하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일생동안 피아노 한 옥타브만큼이라도 다양한 표정들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실제로 아주 드물다. 얼굴은 육장육부와 마음의 상태의 집결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의 대내외적 생명력의 분출 장(場)이기도 하다. 생명력이란 고작 저라는 한사람도 제 맘대로 하지 못할 그릇인가. 수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며 쥐락펴락할 것인가 하는 그 그릇의 차이짐의 분간이기도 하다.
눈에 휘둘리는 반응체로서의 삶은 드러나 보이는 힘의 향방에만 쏠리게 되어 있다. 반면 벌써 마음을 움직여 감하면 그것은 그 감 이상의 공명으로 번져 파급되며 시공을 초월한다. 그렇게 움직인 마음은 한 번에 하나씩 순차적이며 일시적으로 끝나는 핑퐁 관객들의 눈을 벗어난 차원이다. 탁구공을 따라 오가던 눈은 이기고 짐에 명확히 선호하거나 내쳐지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이 그러하지 않은가. 힘이 있어 보이는 것과 실제 생명력이 흘러넘치는 것은 굉장히 오랜 시일을 걸쳐 속내를 간파해야 알 수 있는 경지의 문제다. 그것은 한때 열광 팬심을 몰고 다니던 아이돌의 수명이 왜 그토록 짧은가와도 무관하지 않다. 젊어 어여쁜 피크에 그 한 생 어치의 생명력을 소진하고 나면 자연히 눈에서 멀어질 밖엔. 요즘처럼 눈에 휘둘리는 것은 피아노 교본(서구적 교과서라는 툴)의 영향력이다. 만약 서서히 내적으로 응축된 생명력의 분출이 활화산처럼 발화한다면 그 위력은 가히 지형도를 바꿀만한 것일 수 있다. 당연히 교과서는 사람의 속을 꿰뚫을 시야를 가르칠 수 없다. 아무리 많이 걸어도 누구나 걷더라도 모두 같은 걸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첫인상이 그 사람과 앞으로 관계의 시금석이 되는 것은 똑같이 눈으로 보되 사전 입력된 정보에 의지하지 않는 직관적 감응인 때문이다.

/장은조 번역‧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