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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탐욕을 억누르고 미국을 살려낸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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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탐욕을 억누르고 미국을 살려낸 정책

[왁자지껄 경제학]④뉴딜, 자본주의에 사람을 심다

[글로벌이코노믹=김종길 기자] 사회주의라는 강력한 경쟁자의 급부상에 위기를 느낀 자본주의가‘탐욕’을 잠시 접기로 하면서 사회주의의 장점을 나름 흡수한 '수정자본주의'가 유럽 대륙을 풍미한다. 미국이 받아들인 수정자본주의가 프랭클린 루스벨트라는 한 걸출한 정치가에 의해 국가 정책으로 표출된 사례가 '뉴딜'(New Deal)이다.


미합중국이 건국 이후 가장 번영했던 시기는 잘 생긴 영화배우 출신 대통령 로날드 레이건이 활약하던 1980년대가 아니라 1920년대, 더 정확히는 20년대 초중반이다. '포효하는 20년대'(roaring 20′s)라는 말이 대륙 전역에 고속도로가 깔리고 농촌 깊숙이까지 전기가 보급되며 초고속 성장을 구가하던 당시의 미국을 잘 보여준다. 허버트 후버가 1929년3월 31대 미합중국 대통령에 취임한다. 후버의 임기 첫 해가 지나자 풍요와 번영이 있던 자리를 빈곤과 절망이 대신한다. 범인은 대공황이었고 그 놈은 10여년동안 잡히지 않고 추가 범행을 저지른다. 후버 행정부는 대공황에 무기력하게 당했고 대량 실업, 기아, 노숙자를 방치한 무능한 정권이 됐다.



그 와중에 1932년7월 프랭클린 루스벨트라는 새 인물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 수락연설에서 '미국 국민을 위한 새 정책', 즉 '뉴딜'을 제시한다. 간단히 경제부흥정책이라고 부르기에는 함의가 크다. 대공황이라는 경제적 재앙에 대응하는 루스벨트의 구제 회생 개혁을 위한 입법과 정책이라고 정의하는 것도 너무 도식적이다. 어쨌든 빈곤층 구제, 실업자를 위한 일자리 창출, 중산층 형성, 경제 회생, 공황 재발 방지를 위한 금융제도 개혁 등이 '뉴딜'의 이름 아래 시행된다. 1933년3월4일 32대 대통령에 취임한 루스벨트가 당면한 위기에 강력하게 대처하겠다며 이를 뒷받침하는 정책들을 내놓고 실행하자 국민들의 절망과 공포, 분노는 점차 진정된다.

그는 취임 후 첫 100일동안 수많은 아이디어와 프로그램을 내놓는다. 취임 4일째인 3월6일 일시적으로 은행 영업을 중지시키는 은행 휴일 조치를 단행한다. 37개 주 은행이 문을 닫고 당시 재무성 심사기준(충분한 현금잔고)을 만족시키는 은행들만 영업을 했다. 미국 전역의 5000개 은행 중 2000개 은행이 퇴출됐고 부실은행들이 정리된다. 죽어가던 자본주의가 다시 숨을 쉰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그해 6월16일 전국산업부흥법을 제정했다. 대통령에게 산업 규제 및 독과점 허용권을 부여하고 국가 주도 공공사업을 확립하는 내용이다. 루스벨트가 전국산업부흥법을 통해 독과점을 허용한 것은 기업 도산과 실업이 1차대전 이후 기업들이 과도하게 경쟁한 결과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전국산업부흥법은 정부가 산업별로 제시한 공정경쟁규약 내에서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포괄적 가격 및 생산 협정을 맺는 것을 허용했다. 저임 노동자의 임금 인상 폭도 증가했다. 정부가 산업별로 시장의 과점 구조를 합법화해주는 대가로 저임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을 통한 경제회생을 시도한 것이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당장 먹고 사는 게 급했다. 연방긴급구호법을 제정해 빈곤층과 실업자에게 구호자금을 지급했지만 전반적 경제회복이나 만연한 실업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루스벨트는 실업수당(dole) 대신 노동구호 형태의 정부 보조금 지급을 추진했다. 긴급구호금 지급의 후속 프로그램으로 토목사업청을 설립해 1933년11월부터 약 5개월간 400만명에게 임시 일자리를 제공했다. 각종 SOC 토목사업과 허드렛일에 인력이 대거 투입되고 주당 15달러(정점에는 25달러)의 임금을 지급했다.


루스벨트가 그 중에서도 선호한 프로그램은 민간자원보호군단이다. 계획에서 집행까지 37일만에 이뤄진 것으로 도시 청년 실업자들을 군대식으로 조직해 미국 전역에 캠프를 설치, 황폐해지는 산림 보호에 투입했다. 처음에는 18~26세 미혼 남자로 제한했으나 1933년5월부터 제대군인을 포함시켰다. 25만명 제대군인들이 이를 통해 취업했다. 월급으로 30달러를 주고 25달러는 의무적으로 가족에게 송금토록 했다. 1933~1942년 사이 이들이 심은 나무는 30억 개 이상으로 이 나무들이 태풍과 사막화를 막는 역할을 했다. 민간자원보호군단 사업은 대중적 지지를 얻었고 사업은 홍수 통제, 화재 예방 등으로 확대됐다. 1933년6월부터는 참여자들에 대한 직업훈련과 교육 기회를 제공해 무려 4만명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됐다. 사업의 결과 삼림, 도로, 교량 같은 사회간접자본이 축적됐고 토목 건설공사를 통해 일자리가 창출됐다. 8년간 3백만명의 청년들이 일자리를 얻었다. 공공사업에서 일자리를 얻은 많은 사람들이 받는 돈이 경제에 순환돼 경제를 살리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뉴딜은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도발'이었다. 루스벨트의 대담한 계획과 강력한 추진 의지는 빈사 상태에 빠진 미국 경제의 출혈을 멎게 했고 복지정책과 공공근로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이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 대중들 사이에 퍼져있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증오와 반감은 놀라울 정도로 완화됐다. 하지만 어느 시대건 안 그랬겠냐마는 루스벨트에 의해 추진된, 시장에 대한 정부 개입은 기득권층의 도전을 받았다. 보수주의자들은 뉴딜이 급진적이고 사회주의적이라고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했으며 급진주의자들은 뉴딜이 미온적이라고 비판했다. 루스벨트가 대단한 것은 이러한 비판에 대처하는 그의 방식이다. 그는 이를 오히려 정책 추진에 활용했다. 전국산업부흥법이 위헌 판결을 받자 루스벨트는 바로 '부가 국민 전체에게 보다 넓게 배분되게 만들겠다'며 일련의 법을 제정했다. 이것이 '2차 뉴딜'이다.

상원의원 와그너는 1935년 노조의 조직과 단체교섭 허용, 노동자들이 사용자의 개입이나 지배 없이 단체협약을 수행할 조직과 대표를 선출할 수 있는 국민노동관계법, 소위 '와그너법'을 발의하고 통과시킨다. 이 법은 노동조합, 사용자 연합, 연방정부의 역할에 큰 변화를 안겨주었다. 노동자들은 사용자로부터 자유롭게 자신들을 조직하고 단체로 교섭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보장받았다. 사용자들은 일방적으로 노동자를 지배하던 '갑의 권력'을 상실했고 노사관계에서 우위에 있던 힘도 약화됐다. 정부도 규칙을 제정하고 단체협상에서의 심판을 맡는, 실질적 노동조합의 수호자로 변화했다. 국민노동관계법을 '노동대헌장'(Magna Carter for Labor)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루스벨트는 사회안전망 구축과 노동기준 설정에 큰 변화를 추구했다. 35년 제정된 사회보장법과 38년 제정된 공정노동기준법과 이에 부수된 다른 법률들이 그 초석이 됐다. 1929년 주식시장 대폭락 이후 만연된 실업과 경제력 약한 노령층이 겪어야 하는 비참한 궁핍으로 인해 사회안전망 구축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60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월 200달러의 정부 연금 지불을 요구하는 타운젠트운동은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사회보장법에는 노령층에 대해 연방정부가 의무 지불해야 하는 연금, 연방세 감면을 통해 마련된 주정부의 실업 보험금, 기초생활 노인수급자와 맹인, 아버지 없는 어린이에 대한 연방과 주정부 공동의 현금지원 등이 포함됐다. 그러나 건강보험은 ‘의료의 사회주의화’라는 이유로 미국의사협회가 강력하게 반대해 결국 포함되지 못했다. 현재 미국이 안고 있는 가장 큰 고민인 의료보험 문제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 이를 최근에 오바마가 개혁해낸 것이다.



뉴딜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는 불황의 늪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했다. 국민총생산이 37년 겨우 29년 수준으로 회복됐으나 이듬해 경기는 다시 침체된다. 대중 사이에 번진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과 저항을 완화해 자본주의 체제를 살려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국민을 대공황으로부터 구제하지는 못한 것이다. 미국 경제의 소생은 2차대전 참전으로 겨우 가능했다. 일부에서 미국 경제를 가리켜 '전쟁경제'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러나 뉴딜이 미국 경제를 소생시키는 데 실패했다고 해서 뉴딜이 실패한 정책은 아니다. 사회보장정책과 공공사업정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증가된 소득은 소비지출로 이어짐에 따라 어느 정도 경기를 회복시켰다. 노동자를 보호해 이들이 건전한 중산층을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는데 기여했다.

뉴딜의 공식 명칭은 ‘잊혀진 사람들을 위한 뉴딜’이다. 경제 시스템을 자유방임에서 국가 개입으로 바꾸고 증세를 통해 부를 재분배하겠다는 정책, 이를 통해 소득 양극화를 해소하고 미국을 중산층 사회로 만들겠다는 정책이었다. 루스벨트의 기본적 생각은 사람은 타인의 복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고 다른 사람을 해치면서까지 지나치게 자신의 부를 늘리려 하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당대 독점 기업가들이 보이던 지나친 탐욕을 자제시키고 노동자의 권리들을 강화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부의 재분배, 노동자 권리 강화 등 사회주의의 강점을 적극 수용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몇 년 전 뉴딜을 대규모 토목 공사로 착각한 한 위정자가 23조원을 들여 대한민국 하천을 다 파헤치는 공사를 '뉴딜'이라고 명명했다. 발상도, 과정도 모두 틀렸고 결과물은 없었다. 어설픈 논리로 차용하기에는 너무도 깊은 뜻을 가진, 자본주의에 휴머니즘의 가치를 이식한, 대단한 변혁운동인 것이다. 국민들은 지금 뉴딜 같은 사람 냄새나는 정책을 추진할, 루스벨트 같은 큰 정치인의 출현을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