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자본가들의 의도된 왜곡…스미스는 통곡한다

공유
0

자본가들의 의도된 왜곡…스미스는 통곡한다

[왁자지껄 경제학]⑤자본주의 바이블 '국부론'의 탄생

[글로벌이코노믹=김종길 기자] 1980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축하연에서 공화당원들은 애덤 스미스의 얼굴이 새겨진 넥타이를 매고서 ‘레이건!’을 연호했다. 1992년 소비에트 연방 해체의 전주곡이자 ‘신고전학파’라는, 애덤 스미스를 추종하는 새 경제이론의 등장을 알리던 신호탄이었다. 이후 그나마 자본의 탐욕을 억제하던 뉴딜과 그에 따른 경제 개혁, 각종 사회보장성 제도들이 공격 대상이 되고 세계는 신자유주의자라는 얼치기 수정자본주의의 품에 자신을 내맡긴다.


1776년이었다. 용모도 별로인데다 어느 일요일 아침 생각에 잠겨 잠옷 차림으로 집밖으로 나와 25km를 걷고나서 교회 종소리를 듣고 정신이 들어 집으로 돌아왔다는 영국 글래스고 대학의 한 교수가 ‘국가의 부의 내용과 원천에 대한 고찰(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Wealth of Nations)’이라는 긴 제목의, <국부론>이라는 제목의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 물질 세상의 직전 ‘대장’이었던 중농주의가 막 은퇴한 시점이었다. 스코틀랜드 출신 학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는 사실상 신학자나 철학자에 가까웠던 이전 경제학자들과 달랐다. 순수 경제학자였다. 근대적 의미의 경제학은 그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그의 걸작 ‘국부론’(國富論)은 사실 윤리학 서적이다. 실제로 애덤 스미스는 글래스고 대학에서 도덕철학을 가르쳤으며 첫 저서는 <도덕 감성론>이다. 그의 시대, 혹은 그 직전 시대를 살던 사람들은 명예와 윤리, 의무 등을 중시했으며 물질적 욕망의 추구는 그리 명예롭지 못한 일로 여겼다. 물론 앞서 15C를 전후한 시장경제의 등장으로 물질적 성공도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사람들의 머리를 스쳐갔다. 하지만 잔재한 이전 시기의 ‘모럴'(도덕)이라는 놈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물리치고 물질적 성공만 추구할 용기를 갖게 하는 데 큰 훼방꾼이었다. 신(神)이 마음 속에 여전하고 영혼의 구원을 갈망하며 이것이 세속의 물질적 삶과는 양립하기 힘들다는 사실이 그들을 힘들게 했다. 박애와 이타주의를 평생 윤리로 알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경쟁과 이기주의의 이식은 고통이었다.



이같은 딜레마에 확실하게 마침표를 찍었다는 게 경제사상가로서 애덤 스미스, 경제서적으로서의 <국부론>이 갖는 위대함이다. <국부론>이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가치체계로 정착된 새 윤리를 제시하자 사람들은 이제 더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마음대로 물질적 욕망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 스미스는 시장을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비유했다. 각 개인이 사익을 위해 일해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사람의 이득이 되는 결과로 이끌어 준다는 것이다. <국부론>은 사람들에게 죄책감 없이 그저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일하기만 하면 나머지 부분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알아서 해결해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설파했다. 단 한 푼의 이익에 부모도, 친구도 팔아먹을 수 있는 돈의 노예들에게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사람들이 애덤 스미스의 이름을 연호하며 세상에 그의 신봉자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그들은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 적은 ‘사리’(私利, self-interest)와 ‘사리의 추구'라는 말의 의미를 곡해했다. 그는 경제생활을 할 때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기 위해 행동한다고 했지 부정적 의미에서의 탐욕과 이기적 행동까지 정당화한 적은 없다.온갖 수단을 다 써가며 치부에 바쁜 불쌍한 인간들이 애덤 스미스를 그 방패막이로 삼아서는 안되는 이유다.

많은 스미스 추종자들이 정부의 시장 개입을 어리석고 부도덕한 것으로 몰고간다. 원인은 스미스의 주장에 대한 오해와 의도적 오역에 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경제적 효율은 시장이 완전경쟁적인 경우에만 유효하다. 독과점 시장은 경쟁이 제한적이라 시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소위 ‘시장 실패’가 발생하는 것이다. ‘공해’(公害) 같은 외부비경제가 존재하거나 시장 정보가 불완전할 경우 시장 실패가 발생하기도 한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정부의 세 가지 책무를 말했다. 국방, 법질서 유지, 그리고 공공기관과 공공사업을 설립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공사업에는 공원과 교량 건설, 상하수도 사업 등이 포함된다. 스미스 이후 그를 따르면서도 그 이론을 변용해 적용한 19C 고전파 경제학자들 역시 중앙은행 국유화, 아동 의무교육, 아동 노동 금지, 작업장과 신상품에 대한 안전기준 설정 등이 정부 책임임을 강조했다.

그런데 작금의 신자유주의자들, 특히 금융시장 규제 철폐론자들은 그 논거를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자유방임주의에서 찾으려 한다. 하지만 정작 애덤 스미스는 단 한 번도 ‘보이지 않는 손’을 금융시장에 적용하려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정부는 금융사기와 투기적 공황으로부터 일반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으니 지하에 있는 애덤 스미스가 무덤 밖으로 나와 통곡할 일이다.

스미스가 관찰한 시장은 자율적으로 작동하면서 기술혁신 촉진, 인간 욕구 충족, 낭비 최소화, 기업(가)의 탐욕 규제, 그리고 민중의 부유를 가능케 하는 기구다. 이 시장기구 작동의 원동력이 인간의 이기심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온 <국부론>의 그 유명한 언명이 있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이나 양조장, 또는 빵집 주인의 자비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이익, 즉 돈벌이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성향 외에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는 능력과 부당한 상황에 대해 분노하는 능력을 본성적으로 타고났다고 믿었다. 이같은 능력이 우리가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스미스는 이러한 공감과 분노의 능력을 정확하게 이해하여 사람들의 복지를 전반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사회제도를 마련하기를 원했다. 개인의 이기심에 근거한 자본주의적 거시적 틀을 각종 사회적 제도장치로 보완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애덤 스미스가 18C 자유방임주의의 큰 틀에서 사유 재산권 강화, 수입상품에 대한 관세 축소, 봉건귀족의 특권 철폐, 노동 길드 해체, 국가가 인정한 생산과 유통에서의 독점체제 해체, 금융업자에 대한 적대 시정 등을 주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당시 기업가들을 불신했다. 그들이 지나치게 탐욕스럽다는 이유에서다. 그럼 스미스가 믿은 것은 누구일까? 바로 소비자였다. 누구보다도 소비자의 이익을 옹호했으며 소비자의 욕망과 생산, 경쟁, 노동 분업이 국가의 부를 창출하는 동력이라고 봤다. 애덤 스미스의 추종자이면서 자신 또한 오스트리아 학파의 거두가 된 경제학자 미제스는 이를 ‘소비자가 왕이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를 계승하겠다고 나선 ‘신자유주의학파’ 혹은 ‘시카고학파’라 불리는 이들은 <국부론>이 ‘시장 실패’와 ‘국가 개입의 필요성’ ‘사회보장제도의 필요성’에 대해 분명히 얘기했음은 외면한다. 분명 고의였다. 그들은 시장의 효율성, 자율성을 앞세워 국가는 경제에 개입하지 말라고 반복해 말한다. 그 서슬에 많은 이들이 뒤로 물러나면서 다시 자본이 마음 놓고 탐욕을 부리는 시대가 도래한다. 자본의 탐욕은 세계 경제에도 영향을 미쳐 80년대 초반부터 제3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경제 위기에 내몰린다. 이후 이들 나라에 IMF는 구제금융을 하고 일련의 경제개혁조치들을 권고한다. 미국이 자본주의 체제의 ‘성공 모델’ 국가로 지정 육성한 한국도 결국 98년 외환위기를 겪는다. 신자유주의 사조와 그를 바탕으로 하는 경제 제도 개편이 전세계로 확산됐고 우리나라도 98년 외환위기 결과 신자유주의적 경제제도를 채택해야 했다. 공산권은 완전히 몰락했고 자본주의 체제는 신자유주의, 아니 ‘야수 자본주의’가 다시 지배하고 있다.

아담 스미스가 살아 있었다면 작금의 상황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할까? 아담 스미스는 중상주의에 기반한 과도한 국가 개입을 비판했다. 탐욕으로 물든 지배계층이 밉기는 하지만 현실을 인정한 채로 대신 어떻게 하면 일반 국민들의 삶을 나아지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한편 그는 개인이 공공사업을 장악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사적 요금의 비합리성을 우려했다. 그가 말하는 시장의 자유란 이미 시장을 장악한 채로 온갖 특권을 누리고 있었던 자산가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작은 소자본들이 보다 쉽게 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런 작은 소자본들이 활발하게 활성화되면 결국에는 모든 국민들에게도 이득이 돌아가리라는 믿음으로 시장의 자유를 말한 것이다.

경제활동에서 개인이나 기업이 자기 이익에 따라, 혹은 이를 위해 자유롭게 행동하면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이익을 가져온다는 애덤 스미스의 주장은 규제 철폐의 논리로 쓰이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아젠다다. 스미스는 개인적 성격의 자기애가 사회적 성격의 집단이익이 되려면 사회의 여러 제도가 분권적이고 경쟁적이며 공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늘날처럼 경제가 독과점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면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기 힘들다. 출간된 지 238년이 된 <국부론>은 구시대의 이론이지만 애덤 스미스가 제기한 그 거대하고 중요한 문제의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