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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듯 낯선 듯…거대한 소용돌이 속 '아우라' 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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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듯 낯선 듯…거대한 소용돌이 속 '아우라' 폭발

전혜정의 미술이 있는 삶(39)-낯익은 언어의 낯섦

유사 한자 만들고 깎아 활자본으로


판화 기법 등으로 설치 미술 형태


노동집약적 예술 오브제 탄생시켜


[글로벌이코노믹 전혜정 미술비평가] 우리는 언어로 사고한다. 사실 생각과 느낌은 말이나 글의 속도를 넘어서서 순간의 찰나처럼 지나가 버리기도 하고, 우리의 복잡 미묘한 생각이나 느낌들을 입 밖으로 발화(發話)하거나 글로 쓰면 원래의 반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답답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말이나 글로는 표현 못하는’ 것도 결국 구체적 언어로 표현되어야만 ‘그 무엇’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인간과 동떨어져 양육된 늑대 아이가 인간보다 늑대에 가까운 것은, 그 아이의 의사소통이 인간의 언어가 아닌 늑대 간의 소통에 가깝기 때문이며, 무인도에 고립된 인간 또한 스스로 인간임을 잊지 않고자 혼자서도 대화의 대상이 있는 듯 말 연습을 한다. 하물며 물리적 실체가 있는 글은 우리의 사고를 정리하고 표현하지만 제한하기도 하며, 동시에 우리는 글에 담긴 내용을 오래도록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로부터 새로운 생각들이 뻗어나가기도 한다.

▲슈빙작천서BookfromtheSky,1987이미지 확대보기
▲슈빙작천서BookfromtheSky,1987
중국작가 슈빙(Xu Bing)의 작품들은 말과 글이라는 언어가 갖는 제약과 자유를 극명하게 표현한다. 1955년 중국에서 태어나 지식인 부모님에게서 어렸을 때부터 서예를 연습하고 서체를 배우던 슈빙은 판을 깎아 글자를 만들어내는 판화를 이용해 표의문자(表意文字)의 특수성을 잘 보여준다. 한자 문화권에 익숙한 우리에게도 슈빙이 작품 속에 기입한 글자들은 알듯 모를 듯 도무지 읽히지 않는다.

「천서(天書 _ Book from the Sky)」(1987)에 나타난 글자들은 실제 한자가 아니라 슈빙이 기존에 출간된 중국어 사전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유사 한자이다. 모습은 일반 한자와 매우 비슷하지만 기존 한자의 획을 바꾸고 재조합하여 실제로는 글자도 문장도 아무런 의미가 없고, 어떤 방식으로든 읽을 수 없다. 뜻을 지녀야 의미가 있는 이 땅의 언어는 아름다운 조형성을 지니나 아무런 소리도 의미도 지니지 않은 하늘에서 내려온 글자들이 되어버렸다.

슈빙은 유사 한자를 개발하고 유사 한자 중 조형적으로 완결성이 있는 것들만 추려낸 후 큰 글자와 작은 글자로 나누어 각각 1000자씩 인쇄용 나무활자로 일일이 새겨 깎는데, 이 과정은 몇 년에 걸쳐 나타나며 연구 작업, 노동 작업, 장인들의 수공 정신이 합쳐진 것과도 같다. 그는 이 활자본을 책이나 족자, 포스터의 형식으로 찍어 ‘하늘에서 내린 책(Book from the Sky)’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를 한다. 바닥과 천장, 벽에 빼곡한 한자어를 보면 오랜 중국 역사가 집적되어 있는 듯한 그 규모에 무게감과 중압감을 느끼지만 실제 이 수많은 글자들은 읽을 수도 뜻을 알 수도 없기에, 그 전통과 의미를 벗어버리고 장기간에 걸친 노동 집약적 예술 오브제를 탄생시킨 예술가의 집념에 대한 경외감만을 남긴 채 거대한 혼돈과 회의, 의심의 소용돌이로 우리를 던져 놓는다.

▲슈빙작천서BookfromtheSky,1987이미지 확대보기
▲슈빙작천서BookfromtheSky,1987
실제 전시장에서 중국인들은 아는 글자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 실제로 몇몇은 고어를 찾아내기도 했는데, 이는 슈빙이 재조합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고어와 중복된 것들이다. - 한자어를 전혀 모르는 서양인들은 이 글들의 이해불가능성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다가, 이 글들이 한자를 아는 사람한테도 뜻이 통하지 않음을, 처음부터 의미 없음의 상태를 알고는 놀란다고 한다.

이해 가능한 외견을 하고 있는 슈빙의 글자들은, 한자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나 모르는 사람들에게 모두 이해불가능한 하나의 이미지로서만 존재한다. 하늘과 땅의 중간 존재인 인간들이 서로 말하고 글로 적음으로써 ‘의미’와 ‘이해’를 촉발하는 언어 작용은, 슈빙의 손에 의해 재탄생되어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서 솟아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는 어떤 ‘의미’를 보유하고 있어 ‘이해’가 가능할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이해할 수 될 수 없는 ‘이해불능의 예술적 존재’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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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어는 슈빙에게서 재조합되면서 외견상 전통의 형태를 유지하나 그 의미를 상실하고, 구텐베르크적 활자제작 방식과 판화 기법을 이용하여 물리적 실체를 갖게 되었고, 이것은 다시 설치 미술이라는 새로운 예술적 형태를 띠게 되었다. 슈빙의 작품 속에서는 전통성과 현대성이 묘한 동거를 이룬다. 인류 문화의 축적인 언어적 전통성과 제작 기법에서의 판화의 전통성은 유구한 역사의 신비로운 동양 정신의 산물로 전시공간에서 작품의 ‘아우라(Aura)'를 갖는다.

그러나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과 전통의 전복이라는 ‘아방가르드(Avant-Garde)'적 모더니즘(Modernism) 요소와 ‘놀이로서의 예술’ ‘원본 없음’ ‘이종교합’ ‘정치성’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요소 또한 슈빙의 작품을 이루고 있다. 진지함, 진중함과 오랜 노고, 의미 없음과 재미 등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에서 내려온 책’은 저자인 슈빙 자신도 읽을 수 없는 책이며, 언어를 통해 대표되는 로고스(logos)의 이성과 논리를 뛰어넘어 하늘에서 내려오고 하늘로 날아가는 질문이자 대답인 것이다.

▲슈빙작네모서예교실SquareCalligraphyClassroom,1994이미지 확대보기
▲슈빙작네모서예교실SquareCalligraphyClassroom,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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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빙의 「신 영문 서법(New English Calligraphy)」 프로젝트는 슈빙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탄생한 새로운 동서양의 융합이다. 미국 뉴욕의 뉴뮤지엄(the New Museum) 등 서구의 진중한 전시공간은 어느새 서예를 위한 교실로 변모하여 책상마다 교재, 연습지, 붓과 먹이 놓여있고, 교습용 포스터, 서예 학습용 비디오도 보인다.

관람객들은 앉아서 기초적인 서예 방식을 배우는 학생이 되어 정성스런 마음으로 글자를 따라 쓴다. 그러나 그들이 정사각형의 교본 안에 따라 쓰는 것은 중국어 한자가 아니라 중국 한자처럼 획순이 그려져 있는 영어 알파벳이다. “아기 밥이 엿보네(Little Bob Peep)”라는 익숙한 영어 동요와 그 동요 속 어휘들은 어느새 중국의 서예 문화와 만나 달라지고, 관람자들은 어느새 “Little” “Peep” 등의 단어를 인지하고, 이를 읽고 쓰지만 그들이 슈빙의 안내대로 쓰고 느끼는 “Little Bob Peep”은 구전으로 듣고, 동화책에서 본 그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슈빙작인민을위한예술ArtforthePeople,1999이미지 확대보기
▲슈빙작인민을위한예술ArtforthePeople,1999
“대중을 위한 예술(Art for the People)”은 서체적 글자와 붉은 바탕의 노란색의 대비로 “인민을 위한 예술(Art for the People)”로 변모해 좀더 정치성을 띠게 되었고, 의미의 불완전한 전달과 이미지의 강렬함으로 매우 중국적인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미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되어(defamiliarization)'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해석과 이해의 새로운 기준을 찾는 과정은 습관적인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을 방해하게 됩니다. 습관적인 사고의 게으름은 도전을 받게 되고, 그 결과 인지와 이해의 근원들을 발견하는 더 넓고, 아직 다가가보지 못한 인지적 공간을 여는 것이죠.”

슈빙이 설명한 대로 가장 익숙한 언어의 낯설게 하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언어 지평과 인지 지평을 확장해나가며 의사소통과 사고의 도구이자, 의사소통과 사고 그 자체인 언어를 이제 그 이상의 것으로 인지한다. 그러나 작가는 다시 이야기한다. “간단히 이야기해서, 「천서(Book from the Sky)」는 농담(joke)이자, 익살스러운 제스처(humorous gesture)입니다.” 몇 년에 걸친 노작은 ‘농담’과 ‘장난’ '철학‘과 ’예술‘ 사이를 오가며 슈빙이 영향을 받았다는 선불교의 선문답 같은 커다란 물음표와 느낌표를 남긴다. 우리가 여지껏 의심 없이 써왔던 말과 글에 대한 낯설음을 던져 놓으며.

▲브리타에릭슨(BrittaErickson),슈빙의저서,『의미없는말,말없는의미:슈빙의예술(WordswithoutMeaning,MeaningwithoutWords:TheArtofXuBing)(2001)』의표지이미지 확대보기
▲브리타에릭슨(BrittaErickson),슈빙의저서,『의미없는말,말없는의미:슈빙의예술(WordswithoutMeaning,MeaningwithoutWords:TheArtofXuBing)(2001)』의표지
인터뷰 및 이미지 출처http://www.xubing.com

슈 빙(Xu Bing, 徐 ?, 1955~)


1955년 중국 저장성 지방, 충칭의 한족 가문에서 베이징 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아버지와 같은 대학의 도서관 사서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슈빙은 베이징의 중앙미술학원(the Central Academy of Fine Arts)에서 판화를 전공하고 1987년 동 대학원을 석사 졸업했다. 당시 중국에 성행하던 기존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작품의 성향과는 다른 실험을 하던 슈빙은 1989년 톈안먼사태 이후 슈빙이 추구한 새로운 정신과 중국 현대미술의 전위운동이 큰 비판을 받던 중 미국 위스콘신-매디슨 대학의 초청으로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후 슈빙은 뉴욕, 파리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세계적인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베니스 비엔날레, 시드니 비엔날레, 요하네스버그 비엔날레, 광주 비엔날레 등 국제적인 전시에 계속 참여했으며, 스미소니언 협회의 새클러 미술관(Arthur M. Sackler Gallery), 뉴욕의 뉴뮤지엄(the New Museum of Contemporary Art), 프라하의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10년도 콜롬비아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베이징의 중앙미술학원 교수로 활동하며 베이징과 뉴욕을 오가며 작업을 하고 있다.

전혜정


미술비평가, 독립 큐레이터. 예술학과 미술비평을 공부했다. 순수미술은 물론 사진, 디자인, 만화, 공예 등 시각예술 전반의 다양한 전시와 비평 작업, 강의를 통해 예술의 감상과 소통을 위해 활동하고 있으며 창작자와 감상자, 예술 환경 간의 상호작용을 연구하고 있다. '아트씨드프로젝트(ART Seed Project): 시각문화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국민대 대학원 등에서 전시기획, 미술의 이해 등을 강의하고 있다.

/글로벌이코노믹 전혜정 미술비평가